18:10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있게 내리매 그가 집안에서 정신없이 떠들어대므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10 The next day an evil spirit from God came forcefully on Saul. He was prophesying in his house, while David was playing the lyre, as he usually did. Saul had a spear in his hand
18:11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11 and he hurled it, saying to himself, “I’ll pin David to the wall.” But David eluded him twice.
18:12 여호와께서 사울을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시므로 사울이 그를 두려워한지라
12 Saul was afraid of David, because the Lord was with David but had departed from Saul.
18:13 그러므로 사울이 그를 자기 곁에서 떠나게 하고 그를 천부장으로 삼으매 그가 백성 앞에 출입하며
13 So he sent David away from him and gave him command over a thousand men, and David led the troops in their campaigns.
18:14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14 In everything he did he had great success, because the Lord was with him.
18:15 사울은 다윗이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15 When Saul saw how successful he was, he was afraid of him.
18:16 온 이스라엘과 유다는 다윗을 사랑하였으니 그가 자기들 앞에 출입하기 때문이었더라
16 But all Israel and Judah loved David, because he led them in their campaigns.
목회상담학자인 정태기 목사는 자신의 책 내면세계의 치유를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우리 인간은 마치 자동차와 같습니다. 자동차는 저절로 알아서 움직이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운전사가 운전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입니다. 즉, 운전사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자동차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낯 모르는 운전사에게
인생이라는 자신의 자동차를 내맡긴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테슬라의 자율주행 차량이 현실화된 지금에는 해당하지 않는 비유이지만, 저자가 말하려는 의도가 무엇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자동차가 우리 인생이라면, 우리의 인생은 내가 모르는 내 마음속에 숨겨진 과거의 상처나 경험, 두려움 등의 운전사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할 것 없이 우리의 내면에 있는 자아에 의해서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 자아가 건강한 사람은 긍정적이고 기쁜 삶을 살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반대의 삶을 살게 됩니다.
다윗이 두려운 사울 (10~12절)
노승수 목사는 그의 책 핵심감정에서 (제가 이해한 바가 맞다면) 정태기 목사가 말했던 내면의 운전사를 핵심감정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감정은 불교신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소암 이동식이 최초로 사용한 단어로, 한 사람의 행동과 사고와 정서를 지배하는 중심 감정이며, 주로 주요 대상으로부터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좌절되었을 때 일어나는 감정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이에 해당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사울입니다.
그는 하나님(사무엘)과 백성들에게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강했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바로 어제 승전행진을 하는 도중에 (그것이 아무리 일반적으로 같은 표현이라 할지라도) 경솔한 여인들의 노래를 듣는 순간 그의 핵심감정들이 폭발했던 것입니다.
핵심감정은 부담감, 그리움, 경쟁심, 억울함, 불안, 두려움, 열등감, 슬픔, 무기력, 허무, 소외, 분노입니다.
얼핏 보아도 사울에게 지금 꽤 많은 핵심감정이 작동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이튿날(10)은 사울이 행진 중에 경솔한 여인들의 노래를 듣고 다윗을 주목하기 시작한 다음날입니다.
아마도 그는 밤새도록 10가지 이상의 핵심감정으로 뜬눈으로 밤을 새웠는지도 모릅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에게 힘있게 내렸습니다(10b).
악한 영이 사울을 예전보다 더 강력하게 덮쳤습니다. 그의 상처 난 마음은 사탄의 아주 좋은 먹이입니다.
떠들어 대다, יתנבא 이트나베의 본래 의미는 예언하다 prophesying입니다.
지금 사울은 악령이 충만하여 알지도 못하는 소리를 마구 지껄여 대는 상황입니다.
평소보다 더 강력했던 사탄의 공격에 유일한 치유 방법이었던 다윗의 수금 소리마저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사울은 다윗에게 두 번이나 창을 던져 죽이려 했지만 실패합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사울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다윗이, 동시에 사울을 더 악화시키는 주원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속담으로 치자면 다윗은 사울에게 병 주고 약 주는 존재인 셈입니다.
하지만 잘못이 다윗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큰 원인은 사울의 두려움입니다.
그는 사무엘의 폐위 선언 이후에 늘 불안과 두려움에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사울은 자신과 함께 하시던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것을 느낍니다. 동시에 다윗의 모습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사울의 두려움의 원인입니다. 이 두려움, ירא 야레는 하나님 앞에서 경외심을 갖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혜롭고 사랑스러운 다윗 (13~16절)
사울은 자신이 다윗을 죽이는 것에 실패하자, 그를 어느 지역의 천부장으로 파견합니다.
잘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안 보는 것이 좋습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맡겨진 모든 일을 매우 지혜롭게 처리했습니다. 문제는 사울에게 마치 두 눈으로 보는 것처럼, 다윗에 대한 보고가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다윗을 향한 사울의 두려움은 더욱 커집니다(15). 앞선 두려움(야레)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면, 이번의 두려움(구르)은 다윗이 군사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킬 것 같은 강력한 공포심입니다.
하지만 백성들의 감정은 다릅니다. 다윗이 백성들 앞에서 출입했습니다.
출입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나가고 들어왔다go out and come in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윗이 자신에게 맡겨진 직무를 성실하게 감당했다는 의미입니다.
국가와 국민을 위하여, 성실하고 충성되게 그것도 지혜롭게 일처리를 하는 공무원을 사랑하지 않을 국민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인지 이번에는 여인들만이 아닌, 이스라엘과 온 유다가 다윗을 사랑합니다(16).
사울의 고민과 두려움은 더욱 깊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핵심 구절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12, 14)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실 때 나의 주변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나는 지혜로워집니다.
이것은 성경이 반복적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고, 지혜가 부족한 자가 주께 구하면 풍성히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사람들은 나를 사랑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지혜로워진 나는 지혜롭게 일처리를 하고, 사람들은 그런 나를 사랑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대적은 나를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대적들은 나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물론 다윗처럼 온갖 고난과 역경이 있을 수 있지만, 다윗처럼 끝내 대적들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의 결론입니다.
7명의 손자를 둔 할아버지가 되니, 나를 보고 엄청 좋아하는 어린 손자들도 있고, FaceTime으로 ”안녕하세요“ 한 후에 다시 game에 몰두하는 사춘기가 된 손자도 있다. 모두 귀한 손자들이다. 그러나 예쁘고 더 생각이 나는 손자는 내 근처에 있고 나를 좋아하는 아이다. 하나님은 어떠실까? 왜 하나님은 다윗을 택하셨을까? 왜 사울에게서 성령이 떠나셨을까? 사울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대신 다윗을 두려워 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양때를 지키면서, 시편을 지으며 수금으로 찬양하고 기도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관심을 더 갖는 건은 당연하지 않을까?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육신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 다윗처럼 찬양하는 것이 아닐까? 다윗처럼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가것 아닐까?
그러면 나는? 말씀과 찬양과 기도와 성전을 사모하는가? 주여, 나와 함께 하시옵소서. 한사랑 교회 성도 모두 하나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