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8 Finally, brothers and sisters, whatever is true, whatever is noble, whatever is right, whatever is pure, whatever is lovely, whatever is admirable—if anything is excellent or praiseworthy—think about such things.
4: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9 Whatever you have learned or received or heard from me, or seen in me—put it into practice. And the God of peace will be with you.
4: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0 I rejoiced greatly in the Lord that at last you renewed your concern for me. Indeed, you were concerned, but you had no opportunity to show it.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1 I am not saying this because I am in need, for I have learned to be content whatever the circumstances.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2 I know what it is to be in need, and I know what it is to have plenty. I have learned the secret of being content in any and every situation, whether well fed or hungry, whether living in plenty or in want.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3 I can do all this through him who gives me strength.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이 말씀처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고 좋아하는 말씀은 없을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믿음 좋은 성도들의 비즈니스 사무실에 액자로 달려 있는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 8:7)는 욥기의 말씀처럼, 오늘 바울의 고백은 무엇인가 도전하는 입장에 있는 믿음 좋은(?) 성도들의 집이나 사무실에서 한 번쯤은 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얼핏 보면 예수님을 믿는 강한 믿음만 있다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매우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진짜 그러한 의미로 말했을까요?
본래 말하는 사람의 의도가 있고, 듣고 이해하는 사람들의 입장이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해석하고 듣든지 그것은 각 개인의 문제일 것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본래 성경 텍스트가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제대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소위 이것이 성경 해석학입니다. 당시 문화와 시대적 배경, 그리고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들의 상황 등 모든 것을 고려할 때 비로소 제대로 된 성경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은 사실은 쉬우면서 어려운 일입니다. 그 어려운 것을 성령의 조명하심을 받고 성도 개개인이 말씀을 이해하게 되고, 은혜 받는 것을 볼 때 얼마나 놀라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어떤 부분은 반드시 좀 더 많은 것들을 고려하고 해석해야 제대로 된 의미를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어렵기 보다는, 사람들이 13절 한 구절만 외우기 때문에 오해를 하게 됩니다.
성경은 전후 문맥을 통해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합니다.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8~9절)
끝으로(8a) 바울은 마지막으로 교훈을 합니다.
성도들의 삶에서 마스터 키와 같은 원칙을 알려 줍니다. 가끔 성도들이 어떤 결정을 할 때 그것이 죄냐 아니냐를 따집니다. 예를 들자면 술을 마시는 것이 죄인지, 아닌지, 담배를 피는 것이 죄인지, 아닌지 와 같은 문제들입니다. 이런 고민을 하는 성도들은 매우 귀한 분들입니다.
어쨌든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것보다 더 근원적인 원칙을 제공합니다. 무엇에든지… 라는 것은 앞으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성도들의 모든 삶에 영역에 적용될 원칙이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무엇을 하든지 참되야 합니다. 성도의 정체성은 진실함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는 것은 결코 진정한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습관적으로 살짝 살짝 거짓을 말하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둘러대는 것도 말입니다.
비즈니스를 할 때도 공부를 할 때도 편법이나 불법이 아닌 정도를 걸어야 합니다.
성도는 무엇에든지 경건해야 합니다. 이것은 위엄이 있고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무엇에든지 옳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옳다 함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생각이나 나의 감정, 경험이 기준이 아닌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무엇에든지 정결해야 합니다. 도적적으로 불결함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순결해야 합니다.
성도는 무엇에든지 사랑받고 칭찬받아야 합니다. 현대 기독교가 많이 잃어버린 요소입니다.
세상도 기독교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행위를 보고 칭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슨 덕이나 기림이 있든지, 곧 어떤 일을 하든지 위에 것들을 명심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9a)고 명령합니다.
1세기 바울의 말과 가르침과 행동은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신약성경이 되었습니다.
곧 말씀에 순종하고, 말씀대로 산 바울의 삶을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들과 함께 하십니다(9). 이것이 예수님과 동행하는 비결입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10~13절)
10절부터는 빌립보서 전체의 결말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2년이 넘도록 바울의 사역에 헌금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로마 감옥에 있는 바울에게 에바브로디도를 통하여 교회 소식과 헌금을 전달하게 되었고, 이에 바울은 기뻐하며 빌립보서를 기록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기뻐한 이유는 물질 때문이 아닙니다(11a). 바울은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어떤 형편에든지에 해당하는 원문을 직역하면 어떤 환경에서라도 나는 존재한다입니다.
그리고 자족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우타르케스αὐτάρκης는 성경에서 이 곳에서만 사용되었습니다.
본래는 스토아 철학자들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의미로 사용한 단어인데, 바울은 그와 달리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섭리로 인식하고 그 모든 상황에 적응하는 비결을 배웠다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것이 바로 비천함과 풍부함으로 대비되는 상황입니다. 바울은 전혀 돈이 없었던 얼마 전에도 기뻤고, 빌립보 교인들이 보낸 준 헌금으로 풍부한 지금도 역시 기쁩니다. 왜냐하면 그의 기쁨은 상황이나 물질에 의한 것이 아닌 자신 안에 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빼앗길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곧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모든 것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 때문에 가난해도 기쁘고, 풍부해도 여전히 기쁘다는 것입니다.
바로 비천과 풍부, 배부름과 배고픔, 풍부와 궁핍의 사이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바울의 이 고백은 가난해도 감사합니다! 풍부해도 좋습니다! 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족합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바울의 고백은 그 옛날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외양간 송아지 없어도 여호와만으로 즐거워하고,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겠다는 선지자의 고백(합 3:17~18)과 같은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은 하나님이 우리를 풀무불 가운데서 구해주실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우상에게 절할 수 없습니다(단 3:17~18)라고 고백했던 어린 소년들의 고백과 같은 것입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사는 것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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