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22 If I am to go on living in the body, this will mean fruitful labor for me. Yet what shall I choose? I do not know!
1:23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23 I am torn between the two: I desire to depart and be with Christ, which is better by far;
1:24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4 but it is more necessary for you that I remain in the body.
1: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25 Convinced of this, I know that I will remain, and I will continue with all of you for your progress and joy in the faith,
1: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로 말미암아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26 so that through my being with you again your boasting in Christ Jesus will abound on account of me.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27 Whatever happens, conduct yourselves in a manner worthy of the gospel of Christ. Then, whether I come and see you or only hear about you in my absence, I will know that you stand firm in the one Spirit, striving together as one for the faith of the gospel
1:28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28 without being frightened in any way by those who oppose you. This is a sign to them that they will be destroyed, but that you will be saved—and that by God.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29 For it has been granted to you on behalf of Christ not only to believe in him, but also to suffer for him,
1:30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30 since you are going through the same struggle you saw I had, and now hear that I still have.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햄릿은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왕위까지 차지한 숙부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오르지만 범죄 사실을 밝혀낼 힘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니 너무도 괴롭습니다. 또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없습니다.
자신의 존재 목적에 대한 깊은 성찰과 고민이 담긴 햄릿의 이 독백은 셰익스피어가 독자들에게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를 묻는 무거운 질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요?
살든지 죽든지 유익한 삶 (22~26절)
본문에서 바울 역시 동일한 고민을 합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바울은 이것을 그 둘 사이에 끼었다(23a)라고 표현합니다. 하지만 그는 햄릿과 달리 긍정적입니다.
미국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으면 천국, 살아도 미국이니 얼마나 좋습니까?
바울 역시 혹시 순교를 당한다면 예수님 계시는 천국에 갈 수 있어서 좋습니다.
만일 감옥에서 풀려나와 산다고 해도 그 역시 복음 전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길 수 있기에 좋습니다.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것이 자신에게 더 유익한지 알지 못한다고 고백합니다(22).
만일 자신이 죽거나 사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면 순교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 거하는 것을 선택하고 싶은 마음입니다(23). 하지만 바울은 아직은 자신에게 남은 사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 자신에게는 몰라도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바울이 살아 있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24).
어떤 이유에서 인지는 모르지만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서 풀려나 살 것을 확신합니다(25).
아마도 아직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이 남아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의 사명은 먼저는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어떤 관계는 함께하면 할수록 오히려 서로에게 손해가 되는 만남이 있습니다.
그런 만남은 과감하게 피해야 합니다.
사도와 빌립보 교인의 만남은 그들의 믿음이 성장하고 전진하는 만남이요,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만남입니다. 이런 만남이야 말로 교회 성도들 간에 있어야 하는 진짜 만남인 것입니다.
다음으로 사도 바울의 사명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26).
일종의 영웅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옥고를 치르고 나온 사도에 대한 동경과 자부심입니다.
쓸데없는 세상 자랑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희생의 귀감이 되는 것입니다.
현대는 영웅이 사라진 시대입니다. 제대로 된 삶의 롤 모델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지금이야 말로 균형 잡힌 예수 그리스도께 온전하게 헌신된 바울과 같은 영웅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들의 자랑이 될 만한 사람을 찾습니다!
복음에 합당한 생활 (27~30절)
바울의 대표적인 신학은 이신칭의 입니다. 곧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정통 교리입니다.
이와 대비되는 것이 야고보의 이행득의, 곧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입니다.
두 교리가 마치 대립하는 것처럼 이해할 오해가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얻지만, 진정한 믿음은 반드시 행위를 수반합니다. 믿음과 행위는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바가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27a) 믿음의 자녀라면 그 믿음과 신분에 걸 맞는 생활 태도를 보이라는 것입니다. 결코 그는 행함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습니다.
당시 빌립보는 로마의 속해지면서 사람들은 시민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바 ~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은 무엇인가요?
첫째로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입니다(27b).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은 자라면 당연히 한마음, 한 뜻으로 복음을 위해 협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우리는 신앙생활을 통하여 경험했습니다.
지속적인 자기 부인과 성령의 충만함이 없이는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둘째로 대적자들로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28a).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다 보면 두려울 것이 하나 없습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복음에 합당한 삶은 대적자들에게는 멸망의 증거가 되고,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증거가 됩니다.
모든 성경은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이 지점에서 설명합니다.
행함은 우리가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확신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이런 거룩한 삶은 불신자들에게는 두려움이 됩니다. 자신들의 악함을 드러내는 거울과 같은 것입니다.
세번째로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는 것입니다(29).
기독교는 사실 고난의 종교입니다. 기독교가 타락하기 시작한 것은 유럽의 중심에 서면서부터 입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고난을 통하여 더욱 단단해지고, 성장했습니다.
개인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만 누리고 축복만 받는 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는 것이 진짜 기독교입니다. 이것은 이미 빌립보 교회에서 벌어진 일이고, 지금 우리 모두의 삶에서도 벌어지는 일입니다.
때로는 원하지 않는 어려움이 올지라도 그것이 오히려 우리를 단단하게 연합시키는 접착제라는 사실을, 나의 신앙을 성장하게 하는 영양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도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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