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29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29 Then he gave them these instructions: “I am about to be gathered to my people. Bury me with my fathers in the cave in the field of Ephron the Hittite,
49:30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0 the cave in the field of Machpelah, near Mamre in Canaan, which Abraham bought along with the field as a burial place from Ephron the Hittite.
49:31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31 There Abraham and his wife Sarah were buried, there Isaac and his wife Rebekah were buried, and there I buried Leah.
49: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32 The field and the cave in it were bought from the Hittites.”
9: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33 When Jacob had finished giving instructions to his sons, he drew his feet up into the bed, breathed his last and was gathered to his people.
50:1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1 Joseph threw himself on his father and wept over him and kissed him.
50:2 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2 Then Joseph directed the physicians in his service to embalm his father Israel. So the physicians embalmed him,
50:3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3 taking a full forty days, for that was the time required for embalming. And the Egyptians mourned for him seventy days.
50:4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원하건대 바로의 귀에 아뢰기를
4 When the days of mourning had passed, Joseph said to Pharaoh’s court, “If I have found favor in your eyes, speak to Pharaoh for me. Tell him,
50:5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5 ‘My father made me swear an oath and said, “I am about to die; bury me in the tomb I dug for myself in the land of Canaan.” Now let me go up and bury my father; then I will return.’”
50:6 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6 Pharaoh said, “Go up and bury your father, as he made you swear to do.”
50:7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7 So Joseph went up to bury his father. All Pharaoh’s officials accompanied him—the dignitaries of his court and all the dignitaries of Egypt—
50:8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8 besides all the members of Joseph’s household and his brothers and those belonging to his father’s household. Only their children and their flocks and herds were left in Goshen.
50:9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9 Chariots and horsemen also went up with him. It was a very large company.
50:10 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울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10 When they reached the threshing floor of Atad, near the Jordan, they lamented loudly and bitterly; and there Joseph observed a seven-day period of mourning for his father.
50:11 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이르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 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 강 건너편이더라
11 When the Canaanites who lived there saw the mourning at the threshing floor of Atad, they said, “The Egyptians are holding a solemn ceremony of mourning.” That is why that place near the Jordan is called Abel Mizraim.
50:12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그를 위해 따라 행하여
12 So Jacob’s sons did as he had commanded them:
50:13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13 They carried him to the land of Canaan and buried him in the cave in the field of Machpelah, near Mamre, which Abraham had bought along with the field as a burial place from Ephron the Hittite.
50:14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14 After burying his father, Joseph returned to Egypt, together with his brothers and all the others who had gone with him to bury his father.
돌아가는 인생 (49:29-33절)
야곱은 자녀들에게 예언(유언)을 마치고 숨을 거둡니다.
그는 요셉에게 자신을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레아가 묻혀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해 달라고 다시 한번 부탁합니다.
야곱은 할아버지나 아버지에게는 그의 아내 000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자신의 아내 레아에게는 나의 아내라는 표현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라헬이 아닌 레아와 함께 묻히는 것만으로도 레아나 그녀의 아들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단어는 반복하여 등장하는 돌아가다 입니다.
이어령 교수는 죽음을 일컫는 한국말 돌아가셨다 라는 단어가 기가 막히다 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죽음이란 다시 원래의 자리도 돌아가는 것, 그렇게 거슬러 거꾸로 올라가면 결국 우리의 출발점입니다.
그래서 복음서 저자 중 의사인 누가는 예수님의 족보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순서로 기록했습니다.
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눅 3:38)
인생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는 질문에 대한 분명한 답이 성경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야곱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29)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원어로 보면 33절과 동일한 내 백성에게로 돌아가리니 입니다.
원어에 가깝게 번역하면, 내 백성에게로 모여질 것이다, 합류할 것이다, 모이게 될 것이다 입니다.
아브라함(25:8), 이스마엘(25:17), 이삭(25:29), 야곱(49:33) 모두에게 동일하게 표현된 관용적 구절입니다.
마지막 숨을 쉬고 죽어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다(합류했다, 모였다)
이런 문화와 언어는 결국 그들이 사후세계를 믿고 인정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나그네 같은 인생, 소풍 같은 인생 길을 마치고 모두 집안에 모여서 저녁 식사를 나누는 것과 같은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고백한 것입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빌 1:23-24)
빨리 천국에서 예수님 만나고, 백성들을 만나고 싶지만 사명 때문에 이 땅에 살 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천국에 모이는 것을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습니다. 주일에 교회 모이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교회에 모이는 것이야 말로 천국에 모이는 것에 대한 연습이요, 실제입니다.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은 그러므로 자주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애통하는 인생 (50:1-14절)
창세기 마지막 50장은 야곱의 장례에 대한 기사로 시작합니다. 요셉은 야곱을 애굽식 미이라 처리합니다.
이렇게 할 수밖에 이유는 가나안 땅까지 어떤 조치 없이 유해를 운구하면 당연히 시신이 부패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뇌와 내부 기관을 꺼내서 그 곳을 향신료로 채우고, 시체를 질산칼륨에 담갔다가 마지막으로 린넨 붕대로 감싸는 것입니다. 이렇게 작업하는 시간이 70일 입니다.
그리고는 요셉은 바로의 허락을 얻고 큰 무리를 이끌고 아버지의 유언대로 막벨라 굴에 안치시킵니다.
여기에서 두 번째로 주목하고 싶은 인생의 특징을 나타내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애통입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크게 울고 애통하며(10)입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야곱의 거대한 행상을 보고 아벨라미스라임(11)이라고 말한 것 역시 애굽인의 큰 애통이라는 동일한 의미입니다.
인생은 태어나면서부터 웁니다.
의사가 세게 때려서 우는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폐에 공기가 흡입되면서,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처음 공기를 흡입하는 그 순간부터 인생은 고생(애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태초의 명령을 어기는 그 순간부터 인생의 괴로움과 슬픔이 시작된 것입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역시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애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요 11:33-35)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실 것인데, 왜 우셨을까요?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보시며 애처롭게 여기신 것입니다. 이처럼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애처롭고 애통하는 인생이지만, 신기하게도 그 애통함이 복이 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 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 임이요 (마 5:3-4)
예수님의 첫 번째 설교인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애통하는 자는 하늘의 위로를 받을 것임을 말씀 하셨습니다. 무엇 때문에 인생이 애통합니까? 심령의 가난함, 마음의 곤고함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동일한 산상수훈을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기록합니다.
마태와 누가의 기록을 종합하여 보면, 현실적인 문제로 인한 애통이든 영적, 심적인 문제로 인한 애통이든 애통하는 것 자체가 복이라는 것입니다.
삶의 무게, 죄의 문제, 이별의 아픔이든 그것이 주님께로 돌아가는 발판만 된다면 그것이 축복입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인생이 축복받은 인생인 것입니다.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인생, 애통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지만 진정한 애통은 우리에게 축복임을 믿습니다.
천국에서 만납시다! 그 때까지 교회에서 자주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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