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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12 [새벽묵상] '이미'와 '아직'의 긴장 가운데 | Amid the Tension Between Already & Not Yet (창/Gen 33:12~20)



33:12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12 Then Esau said, “Let us be on our way; I’ll accompany you.”

33:13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13 But Jacob said to him, “My lord knows that the children are tender and that I must care for the ewes and cows that are nursing their young. If they are driven hard just one day, all the animals will die.

33:14 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14 So let my lord go on ahead of his servant, while I move along slowly at the pace of the flocks and herds before me and the pace of the children, until I come to my lord in Seir.”

33:15 에서가 이르되 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 야곱이 이르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15 Esau said, “Then let me leave some of my men with you.”

“But why do that?” Jacob asked. “Just let me find favor in the eyes of my lord.”

33:16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16 So that day Esau started on his way back to Seir.

33:17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17 Jacob, however, went to Sukkoth, where he built a place for himself and made shelters for his livestock. That is why the place is called Sukkoth.

33: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18 After Jacob came from Paddan Aram, he arrived safely at the city of Shechem in Canaan and camped within sight of the city.

33:19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19 For a hundred pieces of silver, he bought from the sons of Hamor, the father of Shechem, the plot of ground where he pitched his tent.

33:20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20 There he set up an altar and called it El Elohe Israel.


 


교회를 다니지 않는 많은 사람들은 예수는 좋지만, 교인(교회)들은 싫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적어도 예수 믿지 않는 자신들과는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하는 크리스천에게서 전혀 다른 점을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교회는 늘 세상에 대해 패배 의식과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지난 2020년 한국사회에서는 코로나 확산과 관련하여 교회가 미안합니다 라는 운동이 확산되었습니다.

어떤 교회는 32가지 항목에 교회가 이러이러해서 미안합니다 라는 내용을 발표하기도 하고, 어떤 교회는 밑도 끝도 없이 교회가 미안합니다 라는 현수막을 걸기도 합니다.

기독교실천윤리위원회(기윤실)에서도 코로나19과 관련하여 교회가 미안합니다 라는 제목의 사과문 (2021년2월)을 게시하고 2가지 실천 사항을 약속했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을 보면서 얼마나 상황이 어려우면…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면서,

저렇게 하는 것이 과연 어떤 효과나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듭니다.

과연 이러한 교회들의 대책에 세상은 감동받고 이제 교회가 제대로 하는구나 라고 좋게 생각을 할까요?



세상을 이기고 승리해야 하는 교회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패배의식에 젖어 세상의 눈치만 보는 천덕꾸러기 교회로 전락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등에 날개가 나와 천사로 변화시키지 않는 것일까요?

그렇게만 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정확한 이유는 천국에 가서 하나님께 여쭤보면 말씀해 주시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천국에 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불쑥불쑥 예전에 죽었던 야곱이 내안에서 살아 꿈틀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야곱처럼 말입니다.


여전한 야곱의 모습

야곱은 브니엘에 하나님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하루 밤 사이에 완벽하게 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당황스럽게도 변한 줄 알았던 이스라엘의 모습에서 여전히 야곱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지나치리 만큼 형에게 선물을 강요하는 것과 형 에서를 따라가지 않는 두가지 모습에서 우리는 예전의 야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아내들과 자식들을 형 에서에게 소개하고, 에서는 먼저 보낸 짐승들에게 대해서 묻습니다(8). 그러자 야곱은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라고 답변합니다. 또한 에서를 만난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다(10)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려면 예물을 드려야 하듯이, 형님에게도 그리 하겠다는 것입니다. 에서는 자신 역시 이미 부자이기 때문에 필요 없다고 거절하지만 강권하는 야곱을 못 이기고 선물을 받습니다.

Sama라는 학자에 의하면 근동 지역의 에티켓은 선물을 주는 자는 여러 차례 정성을 들여 권해야 하며, 받는 자는 몇 차례 사양하다가 못 이기는 척하고 받는 것이라 합니다.

우리 나라의 문화와 상당히 비슷합니다. 그래서 송병현 교수는 이렇게 재미있게 표현합니다.


이들은 사회적인 풍습에 의해 이미 짜여진 각본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만일 야곱이 “그래? 정 싫다면 할 수 없지!”하고 더 이상 권하지 않으면 칼부림 난다!


아마도 야곱은 형에게 혹시라도 맘 변하지 말라고 확실히 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형이 함께 세일로 가자는 호의를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우회적으로 거절하는 그의 모습은 여전히 남아 있는 인간적인 불안감,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하지 못함의 반증입니다.

존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어쩌면 에서의 자비심이 지속되지 않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오래지 않아

어떤 새로운 갈등 원인이 그들 사이에 발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자들의 말처럼 에서가 사는 세일이 약속의 땅 가나안 지역이 아니기에 야곱이 거절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야곱의 인간적인 계산이 분명합니다.

만일 정말 하나님과의 언약을 위한 것이라면 그는 세겜에 머물 것이 아니라 벧엘까지 가야했습니다.



숙곳, 세겜에 머무르는 야곱

야곱은 형을 뒤 따르겠다고 말했지만, 그와 반대 방향으로 향합니다. 역시 거짓말이었습니다.

숙곳이라는 지역의 의미는 초막이라는 뜻입니다. 세겜은 예루살렘에서 60km(40mile) 북쪽에 위치하며,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역(요셉의 뼈를 묻음)입니다.

야곱은 벧엘 이후에 처음 제단을 쌓고 엘 엘로헤 이스라엘, 곧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단은 히브리어로 일반적인 제단을 의미하는 바나가 아닌 기둥을 뜻하는 히찌이브 입니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함에 대한 기념비적인 감사의 기둥을 세운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서원은 벧엘까지 입니다.

이 정도면 됐다라고 멈추는 순간이 넘어지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변화와 성장은 한 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걸쳐 계속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즉각성Already과 점진성not yet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1-24)


때론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신에게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지극히 정상입니다. 삶은 성화의 과정입니다. 야곱이 변하여 이스라엘로 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구원(칭의)을 받은 죄인이라고 그리스도인에 대해 표현합니다.

야곱과 이스라엘의 끊임없는 싸움 가운데 결국에는 완전한 이스라엘이 되어지는 날을 바라보면서

서로 용납하고 용서하고 격려하며 나가야 합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격려함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르는 은혜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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