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0 these are the things God has revealed to us by his Spirit.
The Spirit searches all things, even the deep things of God.
2: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1 For who knows a person’s thoughts except their own spirit within them? In the same way no one knows the thoughts of God except the Spirit of God.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2 What we have received is not the spirit of the world, but the Spirit who is from God, so that we may understand what God has freely given us.
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3 This is what we speak, not in words taught us by human wisdom but in words taught by the Spirit, explaining spiritual realities with Spirit-taught words.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4 The person without the Spirit does not accept the things that come from the Spirit of God but considers them foolishness, and cannot understand them because they are discerned only through the Spirit.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5 The person with the Spirit makes judgments about all things, but such a person is not subject to merely human judgments,
2: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16 for,
“Who has known the mind of the Lord
so as to instruct him?”
But we have the mind of Christ.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인간에 초점을 가지고 철학을 했던 중국 철학자가 있습니다.
한사람은 맹자(孟子)이고, 다른 한사람은 순자(荀子)입니다.
두 철학자는 사람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은 전혀 달랐습니다.
맹자는 인간은 본래 선하게 태어났다는 성선설(性善說)을, 순자는 그와는 반대로 인간은 본래 악하게 태어났다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했습니다.
성선설을 따르는 사상가들로 스토아학파가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자연의 이성법칙에 따라 행하기만 하면 그것이 선이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또한 프랑스의 철학자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인간의 본성은 본래 선한 것인데, 문명과 사회 제도의 영향을 받아 악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은 천성에 속하고 악은 인위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후 독일의 교육자이자 유아교육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프뢰벨 Friedrich Wilhelm August Fröbel 은 유아의 마음속에 있는 신성을 어떻게 키워 나가야 하는지를 고민했습니다. 성선설에 기반한 사상입니다.
반면에 순자는 인간의 성품은 악하다. 선한 것은 인위(人爲)다 라고 말했습니다. 선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후천적 노력과 교육에 의한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상가들은 성악설을 따릅니다.
우리 기독교 역시 원죄 사상에 의해 성악설에 가까운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인간의 처음 시점을 언제로 보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아담의 타락 전이냐, 후냐,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이냐 후냐에 따라서 관점이 바뀝니다. 타락 후 인간은 본성상 악하지만, 구원을 받은 인간은 본래 하나님이 선하게 만드신 본성을 회복합니다. 그리고 평생을 더 선하게 살려고 싸우는 성화의 과정을 겪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선하냐 악하냐의 구분이 아닌,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리하자면 인간은 성선설과 성악설 모두 해당합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정답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사역 (10~11절)
사도는 지금 서로 잘 났다고 다투고 있는 교회에 복음의 기초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의 한 수 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악하게 서로 다투는 자들에게 크리스천의 본성이 어떤 것인지를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독한 사람이라고 해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계속 다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고린도전서는 교회의 목회에 매우 유익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감추어진 지혜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통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보여졌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깊은 속을 오직 사람의 영만이 알 수 있듯, 하나님의 생각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만이 알 수 있습니다(10~11).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3b)
삼위일체 하나님의 가장 대표적인 사역이 창조사역과 구속사역입니다. 그리고 삼위는 항상 함께 일하십니다. 하지만 사역에 있어서는 고유의 주된 역할이 있습니다. 구속사역에 있어서 성부는 구원의 관한 모든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성자는 구원을 십자가에서 온전히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성자가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성도 각 개인이 믿도록 적용하여 완성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성령이 없이는 그 누구도 예수를 믿을 수 없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 (12~16절)
바울은 이제 고린도교인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앞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1:18, 23)가 비신앙인들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자들이 믿는 자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오직 성령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자신의 속을 자신의 영이 알듯이, 하나님의 영이 우리 안에 오시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성령이 임한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하고 싶은 점입니다.
성령, 하나님과 반대되는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 세상의 영을 가진 자들과 구별되는 존재가 우리입니다.
사도는 세상의 영이 있는 사람들과 성령이 임한 사람들의 차이를 생각하게끔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이 주신 값진 은혜를 생각하고 부끄러워하도록 도전하는 것입니다(12).
나는 성령이 임한 존재로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이어서 사도는 자신의 가르침, 설교, 전도도 사람의 지혜가 아닌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만 분별할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더 근본적인 세상이 존재합니다.
그러니 3차원적인 세상만을 사는 사람과 4차원의 세상을 사는 사람은 같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전자는 이 땅을 살아가면서 눈에 보이는 물질, 명예, 인기, 쾌락을 쫓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들과 차원이 다릅니다. 우리는 그들이 알 수도, 받을 수도 없는 세계를 소유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가진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바라보는 성도들의 두번째 정체성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이해하고,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세상 이치를 넘어서는 존재임을 말합니다(15).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주님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성령충만입니다(16).
성자는 오셔서 성부만 증거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은 오셔서 오직 성자만 증거합니다.
만일 내 마음에 성령이 계시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입술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예수를 증거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성령의 충만을 위해 기도할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이 충만해지기를 기도할 때입니다.
명심합시다! 우리는 성령이 임한 존재,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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