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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4 [새벽묵상] 정체성과 상관성 사이에서 | Between Identity and Relevance (스/Ezr 4:1~10)



4:1 사로잡혔던 자들의 자손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듣고

1 When the enemies of Judah and Benjamin heard that the exiles were building a temple for the Lord, the God of Israel,

4:2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우리도 너희 같이 너희 하나님을 찾노라 앗수르 왕 에살핫돈이 우리를 이리로 오게한 날부터 우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노라 하니

2 they came to Zerubbabel and to the heads of the families and said, “Let us help you build because, like you, we seek your God and have been sacrificing to him since the time of Esarhaddon king of Assyria, who brought us here.”

4:3 스룹바벨과 예수아와 기타 이스라엘 족장들이 이르되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 왕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 하였더니

3 But Zerubbabel, Joshua and the rest of the heads of the families of Israel answered, “You have no part with us in building a temple to our God. We alone will build it for the Lord, the God of Israel, as King Cyrus, the king of Persia, commanded us.”

4:4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4 Then the peoples around them set out to discourage the people of Judah and make them afraid to go on building.

4:5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5 They bribed officials to work against them and frustrate their plans during the entire reign of Cyrus king of Persia and down to the reign of Darius king of Persia.

4:6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

6 At the beginning of the reign of Xerxes, they lodged an accusation against the people of Judah and Jerusalem.

4:7 아닥사스다 때에 비슬람과 미드르닷과 다브엘과 그의 동료들이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게 글을 올렸으니 그 글은 아람 문자와 아람 방언으로 써서 진술하였더라

7 And in the days of Artaxerxes king of Persia, Bishlam, Mithredath, Tabeel and the rest of his associates wrote a letter to Artaxerxes. The letter was written in Aramaic script and in the Aramaic language.

4:8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올려 예루살렘 백성을 고발한 그 글에

8 Rehum the commanding officer and Shimshai the secretary wrote a letter against Jerusalem to Artaxerxes the king as follows:

4:9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의 동료 디나 사람과 아바삿 사람과 다블래 사람과 아바새 사람과 아렉 사람과 바벨론 사람과 수산 사람과 데해 사람과 엘람 사람과

9 Rehum the commanding officer and Shimshai the secretary, together with the rest of their associates—the judges, officials and administrators over the people from Persia, Uruk and Babylon, the Elamites of Susa,

4:10 그 밖에 백성 곧 존귀한 오스납발이 사마리아 성과 유브라데 강 건너편 다른 땅에 옮겨 둔 자들과 함께 고발한다 하였더라

10 and the other people whom the great and honorable Ashurbanipal deported and settled in the city of Samaria and elsewhere in Trans-Euphrates.


 


현대 교회가 겪는 현장의 질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세상과 관계를 맺느냐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자면 매일 만나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직장 상사나 동료, 후배들과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회식 자리에서 술을 마실지 말지 와 같은, 어찌 보면 조금은 유치한 문제에서부터 성소수자들을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조금은 심각하고 중요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전영역에 걸쳐 끊임없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해야 하는 것이 세상과 우리 크리스천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들이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독일의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은 현대교회의 위기는 정체성의 위기crisisof identity와 상관성의 위기crisis of relevance로 집약된다고 말했습니다. 택하심을 입은 백성으로서 거룩과 순결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과 관계성을 택할 것인가? 이것이 바벨론 같은 오늘을 살아가는 크리스천의 현실적인 고민이고, 현대교회의 위기이며, 에스라 공동체의 눈 앞에 직면한 문제였습니다.



새로운 위기

나라가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가 당시 최고의 문명인 바벨론에서 지낸 50년은 절망적인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더 좋은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더군다나 그곳에서 태어난 2세들은 전혀 조국과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경험이 없는 새로운 세대들이었습니다.

고레스에 의해 포로 귀환이 이루어질 때 바사/페르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유대인은 다니엘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는 포로들의 대열에 합류하여 고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고령이었고, 국가에 매우 중요한 인물이어서 귀환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이미 바벨론-바사로 이어지는 이방의 삶에 익숙해지고 자리를 잡은 유대인들이 삶의 터전을 떠나 황폐해진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포로 귀환은 또 다른 위기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1b)은 귀환자들의 정착을 더욱 어렵게 했습니다. 그들은 북이스라엘을 점량했던 앗수르제국의 정책에 의해 사마리아로 이주해온 이방인들의 후손들로 다양한 이방인들로 구성된 혼혈족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무시하며 홀대했던 출발이 이러한 역사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앞선 3장에서 유대인들은 포로귀환 2년 만에 성전의 기초를 다 놓고 예배를 드리며 감격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마리아인들이 나타나 자신들도 성전 건축에 함께 참여하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때 갈등합니다.

과연 이들의 선의의 제안을 받아야 할 까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좋은 일에 모든 사람이 함께 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닌가요?

아니면 옹졸하고 치사스럽게 보여도 유대인들만 건축에 참여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요?



계속해서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대적자들은 앗수르 에살핫돈 명령으로 예루살렘 도착 후 지금까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신앙은 앗수르 왕의 혼합정책에 의해 이방의 모든 신들을 섬기는 혼합종교입니다.

그리고 북이스라엘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마저 그들의 영향을 받아 혼합종교가 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나님이 아니라 많은 신들 중에 하나일 뿐이었습니다(왕상 17장 참조).

그러므로 그들의 이러한 제안은 결국 성전 건축을 방해하기 위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총독 스룹바벨과 제사장 예수아와 족장들은 이것을 알고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데 너희는 우리와 상관이 없느니라 바사와 고레스가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3b) 고 대답합니다.



혼합주의를 경계하라

서론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러한 도전은 지금도 우리 삶에서 순간순간 매일 벌어지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동네에서 아이들 학교를 가보면 히잡을 쓰고 다니는 여자아이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늘어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슬림이나 불교와 같은 타종교인들과는 어떻게 대화해야 할까요?

또한 LGBTQ[1] 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자세를 취하며, 그들과 관계를 맺어야 할까요?

다른 종교는 아니어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 직장이나 학교, 생활 전영역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어때야 할까요? 그들과 베스트 프렌드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요?

좀더 심각한 문제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가족들은 어떻게 상대해야 할까요?

그리고 심지어 교회 안에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기준을 잘 세우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과는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으로서의 귀함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너무 지나쳐 신앙의 혼합주의, 기독교적 가치관의 혼합주의가 오면 그것은 잘못된 관계입니다.

이것은 타종교, LGBTQ와 같은 기독교와 기본적인 교리에서 배타적인 관계에서뿐만이 아니라, 가족이나 심지어 같은 교회에 성도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개인의 순수한 하나님 제일주의, 오직 예수 사상을 위협하는 관계는 피하거나 자제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세상은 휴머니즘, 박애주의를 외치며 인류가 하나 될 것을 강조합니다.

교회들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될 것을 강조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을 훼손하고 잃어버리면서까지 하나가 되는 것을 결코 하나님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어쩌면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보다 더 인자하고 자비로운 척 하는 것이 가장 큰 죄악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세상과 관계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선까지 입니다. 그것은 세상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되, 우리의 거룩한 정체성을 훼손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 11:45)


[1] 여성 동성애자를 뜻하는 레즈비언(Lesbian), 남성 동성애자를 뜻하는 게이(Gay), 양성애자를 뜻하는 바이색슈얼(Bisexual), 성전환자를 뜻하는 트렌스젠더(Transgender)와 성 소수자 전반을 뜻하는 퀴어(Queer) 혹은 성 정체성을 고민하는 사람(Questioning)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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