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헌금함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1 Jesus looked up and saw the rich putting their gifts into the offering box,
21:2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2 and he saw a poor widow put in two small copper coins.
21:3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3 And he said, “Truly, I tell you, this poor widow has put in more than all of them.
21:4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4 For they all contributed out of their abundance, but she out of her poverty put in all she had to live on.”
21: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5 And while some were speaking of the temple, how it was adorned with noble stones and offerings, he said,
21: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6 “As for these things that you see, the days will come when there will not be left here one stone upon another that will not be thrown down.”
21:7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7 And they asked him, “Teacher, when will these things be, and what will be the sign when these things are about to take place?”
21:8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
8 And he said, “See that you are not led astray. For many will come in my name, saying, ‘I am he!’ and, ‘The time is at hand!’ Do not go after them.
21:9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
9 And when you hear of wars and tumults, do not be terrified, for these things must first take place, but the end will not be at once.”
요즘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는 구약의 율법적인 것으로 예수님의 구속사역을 통해 율법을 완성하시고 은혜의 시대로 접어든 지금은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주로 유럽교회와 영국교회를 통해서 주장되어왔고, 한국에도 상륙한 것으로 보입니다.
십일조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자면 논문을 써야 할 것입니다.
십일조는 율법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간단하게 기본적인 부분을 언급하면 먼저 십일조를 율법적으로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하기 싫은데 억지로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누구도 이에 대해서 정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하신 이후에는 제사나 제도와 관련된 의식법은 더 이상 지키지 않습니다. 하지만 도덕법은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십일조는 의식법일까요? 도덕법일까요?
그것은 구약 시대에 십일조와 관련된 율법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나님이 명령하신 이유는 레위지파(민 18:21)와 구제(신 26:12)를 위한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성막을 섬기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구약의 레위지파, 성막, 제사제도가 사라졌으니 당연히 십일조도 필요 없다고 주장합니다. 율법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여전히 전문 사역자들이 존재하고, 우리가 예배하기 위한 건물로서 교회가 있으며, 가난한 자들이 있습니다. 십일조는 율법이자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는 사랑의 법입니다.
십일조의 정신은 사랑이고, 오히려 도덕법에 가깝습니다.
십일조는 사역자의 생활을 보장하고, 교회 건물을 유지하며, 교회의 모든 사역과 구제 사업에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율법의 완성인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인 것입니다.
십일조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의 고백입니다
십일조는 동시에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는 최소한의 기준입니다.
어떤 분들은 직분자를 세우는데 십일조를 조건으로 하면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옳은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든지 직분을 얻기 위해 돈을 주고 사는 것처럼 십일조를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교회의 중직자는 신앙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모범을 보이며 믿음의 본을 보여야 하는데, 그 중 하나가 물질에 대한 믿음의 자세입니다. 중직자는 적어도 물질과 하나님에 대한 우선순위가 분명히 정리된 자여야 합니다.
그 최소한의 증명이 십일조, 주일헌금, 감사헌금, 절기헌금과 같은 규칙적인 헌금생활입니다.
어떤 분들은 십일조를 소수점까지 계산해서 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참으로 귀하고 귀여운 신앙입니다.
십일조는 최소한의 가이드 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나의 이 모든 것들을 주신 것을 믿는 믿음에 대한 최소한의 고백 말입니다.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레 27:30)
이 구절이 율법으로 들리십니까? 아니면 믿음에 대한 고백을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들리십니까?
후자입니다. 삶의 모든 열매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니, 그것에 대한 너의 믿음을 날마다 고백하라는 고귀한 하나님의 명령이고, 이 명령은 신약시대라고 끝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십일조 하실 필요 없습니다. 만일 본인의 상황이 훨씬 괜찮다면 십이조, 십삼조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새들백처치 릭 워렌 목사는 수익의 95%를 드린다고 말씀 드린바 있습니다. 십의 구조입니다.
반대로 상황이 너무 어려우신 분들은 당연히 그보다 못 드릴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액수가 아니라 믿음입니다! 믿음! 하나님이 나를 먹여 살리신다는…
십의 십조를 드린 여인
예수님은 성전에서 헌금하는 자들을 자세하게 관찰하십니다. 부자들은 자신들의 헌금을 자랑하듯 헌금함에 넣습니다. 하지만 어떤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을 넣었습니다. 렙돈은 유대의 가장 작은 화폐단위로 로마 화폐의 1/2고드란트에 해당합니다. 그러니까 그 과부가 한 헌금은 1고드란트 입니다.
어느 학자에 의하면 렙돈은 1/8센트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두 렙돈은 미국화폐로 1/4센트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녀가 가진 전부를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십의 십조를 드린 것입니다.
돈이 너무 적어서 있으나 마나 해서 다 드렸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볼 때 그녀는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생활비 전부를 드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입니다.
가난한 과부를 보니, 사람이 물질이 없어서 헌금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어서 못할 뿐입니다.
잘못된 헌물로 지어진 성전의 운명
오늘 과부가 드린 헌금의 사건은 바로 앞선 예수님의 그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니 그들이 더 엄중한 심판을 받으리라(20:47)라는 말씀과 연결되는 사건입니다.
그들은 남편 잃어 자신을 보호할 사회적, 제도적 힘이 없는 과부의 재산을 빼앗습니다.
과부는 그래서 가난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생활비 전부를 드립니다.
그러나 서기관, 제사장, 장로들은 과부의 재산을 빼앗아 부를 축적하고 그것으로 자랑하듯 헌금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헌물로 지어지고 유지되는 성전(5)은 이제 상상하지도 못한 운명 앞에 놓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사랑과 믿음 없이 드려진 헌금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헌금으로 지어지고 유지되는 성전 역시 더 이상 하나님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단순히 크고 화려한 건물일 뿐입니다.
십일조를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따지는 것 자체가 참으로 우습습니다.
하나님께 더 많이 드리고 싶지 않다는 본심을 드러내는 것 아닌가요?
하나님은 돈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이웃에 대한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더 많이만 드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자신의 전부를 드린 가난한 과부처럼 말입니다.
복 받기 위해서 헌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많이 드리고 싶어서 믿음의 복과 물질의 복을 받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보인다? 주님은 두 렙돈을 넣는 과부의 믿음을 보셨다. 주님은 언제나 믿음을 보셨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말씀하신다. 믿음은 우리 안에 숨겨져 보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보여 주려는 바리새인의 헌금, 보여지는 과부의 헌금. 그렇다 믿음은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이다. 믿음은 눈물로, 기도로, 언어로, 행동으로, 헌금으로 보여진다.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보여진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면 보여 주려고 하지 않아도 보여 지는 것이다. 안 보이는 것 같으나 보인다. 믿음은 보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