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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4 [새벽묵상] 아버지와 두 아들의 비유 | The Parable of the Father & Two Sons (눅/Lk 15:11~32)



15:11 또 이르시되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11 And he said, “There was a man who had two sons.

15:12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2 And the younger of them said to his father, ‘Father, give me the share of property that is coming to me.’ And he divided his property between them.

15:13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

13 Not many days later, the younger son gathered all he had and took a journey into a far country, and there he squandered his property in reckless living.

15:14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4 And when he had spent everything, a severe famine arose in that country, and he began to be in need.

15: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5 So he went and hired himself out to one of the citizens of that country, who sent him into his fields to feed pigs.

15: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6 And he was longing to be fed with the pods that the pigs ate, and no one gave him anything.

15: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7 “But when he came to himself, he said, ‘How many of my father's hired servants have more than enough bread, but I perish here with hunger!

15: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8 I will arise and go to my father, and I will say to him, “Father, I have sinned against heaven and before you.

15: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19 I am no longer worthy to be called your son. Treat me as one of your hired servants.”’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0 And he arose and came to his father. But while he was still a long way off, his father saw him and felt compassion, and ran and embraced him and kissed him.

15: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1 And the son said to him, ‘Father, I have sinned against heaven and before you. I am no longer worthy to be called your son.’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2 But the father said to his servants, ‘Bring quickly the best robe, and put it on him, and put a ring on his hand, and shoes on his feet.

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3 And bring the fattened calf and kill it, and let us eat and celebrate.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24 For this my son was dead, and is alive again; he was lost, and is found.’ And they began to celebrate.

15:25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25 “Now his older son was in the field, and as he came and drew near to the house, he heard music and dancing.

15:26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26 And he called one of the servants and asked what these things meant.

15: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 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7 And he said to him, ‘Your brother has come, and your father has killed the fattened calf, because he has received him back safe and sound.’

15:28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8 But he was angry and refused to go in. His father came out and entreated him,

15:29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29 but he answered his father, ‘Look, these many years I have served you, and I never disobeyed your command, yet you never gave me a young goat, that I might celebrate with my friends.

15: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0 But when this son of yours came, who has devoured your property with prostitutes, you killed the fattened calf for him!’

15: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1 And he said to him, ‘Son, you are always with me, and all that is mine is yours.

15: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32 It was fitting to celebrate and be glad, for this your brother was dead, and is alive; he was lost, and is found.’”


 


소위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비유입니다. 예로부터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램브란트의 탕자의 귀향 과 같은 작품은 지금도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또한 헨리 나우엔은 램브란트의 탕자의 귀향을 보며 깊이 묵상하고 같은 제목으로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21세기 C.S. 루이스라고 불리는 팀 켈러 목사는 본문을 설교한 것을 탕부 하나님 The Prodigal God 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엮어 출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은사인 에드먼드 P. 클라우니 박사가 본문을 설교한 것을 들은 후에 자신의 기독교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기독교의 은밀한 심장을 들여다본 느낌이었다. 그 뒤로 나는 자주 이 비유를 가지고 상담하고 가르쳤다. 여태까지 내가 본 바로는, 다른 어떤 본문보다 이 비유의 참 의미를 설명해 주었을 때

거기서 격려와 깨달음과 도움을 얻는 사람이 가장 많았다.


그만큼 본문의 비유는 기독교의 핵심적인 진리를 잘 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 라는 전통적인 제목에서 느껴지는 본문을 바라보는 관점은 둘째 아들에게 쏠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둘째 아들뿐 아니라 큰 아들에게 관심을 갖습니다.

또한 더 나아가 팀 켈러 목사처럼 그 두 아들의 아버지에 대해서 최종적인 관심을 가지기도 합니다.



아버지와 둘째 아들 (12~24절)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 중에서 자신에게 돌아올 분깃을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스라엘의 상속법은 맏아들은 모든 동생들보다 2배의 유산을 상속 받습니다. 그러니까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전 재산 중 1/3을 받고, 형은2/3를 받는 것입니다.

단,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만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둘째 아들의 요구는 상식과 윤리를 넘어선 패륜인 것입니다. 아버지보고 지금 죽으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아버지는 그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습니다(12b). 자신의 몫을 챙긴 둘째 아들은 먼 나라로 가서 가진 재산을 다 낭비하고, 유대인들이 혐오하는 돼지를 치는 일을 하며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라도 얻어 먹으려 하지만 그것조차 주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에 그는 스스로 돌이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와 품꾼 중에 하나처럼 살 것을 각오하고 돌아옵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는 둘째 아들을 알아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20).

이 구절에서 알 수 있는 몇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 아들을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윗사람은 고귀하여 절대로 달리지 않는 유대인의 문화에서 아버지가 먼저 달렸다는 표현은 한없는 아버지의 사랑을 묘사합니다.

그리고는 아들이 준비한 사죄의 멘트도 말하기 전에 그 입을 사랑의 입맞춤으로 막아 버립니다.

또한 그 아들의 얼굴에 묻은 부정한 짐승인 돼지의 오물까지 자신의 눈물로 닦아 냅니다.

그제서야 돌아온 아들이 회개의 고백을 하지만, 아버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종들을 시켜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긴 후,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입니다.

앞선 두 비유와 동일한 패턴입니다. 천국은 잃었던 영혼을 찾아 날마다 기쁨의 잔치가 벌어지는 곳입니다.

이러한 천국을 아버지는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24)고 정의합니다.



아버지와 첫째 아들 (25~32절)

이야기가 다른 국면으로 흐릅니다. 잊고 있었던 첫째 아들이 등장합니다.

열심히 밭에서 일하고 돌아오던 큰 아들은 요란한 잔치소리를 듣고 한 종에게 자초지종을 물어, 집 나간 동생이 돌아와 아버지가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노하여 집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나와서 첫째 아들에게 함께 들어갈 것을 권합니다. 하지만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모두 삼켜버린 아들을 위해서는 송아지를 잡고,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고 섬겼던 자신을 위해서는 염소새끼도 주지 않았다고 따집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1-32)고 설득합니다.

그렇게 이 아름다운 비유는 열린 결말로 마무리 됩니다.



이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당연히 당시에 명실상부한 죄인인 세리나 창녀, 이방인들을 비유합니다.

그들은 아버지를 떠났고, 아버지를 자신이 원하는 대로 조정하고 싶어하는 죄인으로 집 밖에 탕자입니다.

하지만 탕자는 집 밖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한번도 아버지 곁을 떠난 일이 없었던 첫째 아들 역시 사실은 집 안에 있는 탕자였습니다. 첫째 아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도덕성으로 말미암아 교만했습니다. 특히 그는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그저 고용인과 종의 관계, 곧 율법적인 관계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누리는 것은 자신이 잘해서 누린다는 착각이었습니다.

결국 첫째 아들도 둘째 아들도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에 진정한 사랑으로 반응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다행히도 둘째 아들은 고난을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은혜로서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현대사회에서 둘째 아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일까요? 동성애자, 노숙자, 범죄자들일까요?

그러면 첫째 아들은 어떤 부류의 사람일까요? 한번도 아버지를 떠나지 않고, 성실하게 동생이 돌아온 날에서 밭에서 일을 하다가 돌아온 형… 나는 이 비유에서 어떤 아들입니까?

만일 내가 둘째 아들과 같은 죄인의 부류라면 속히 회개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와야 할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용서하지 못할 죄가 없습니다.

아직도 여전히 두 팔 벌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아들을 다시 찾기를 원하십니다.

만일 내가 첫째 아들과 같은 부류라면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아버지와 같은 마음으로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그 마음이 없는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천국 잔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가장 낭비가 심한 존재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입니다. 그는 집 안의 탕자든 집 밖의 탕자든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해서 그 어떤 것도 아끼지 않는 탕부 입니다. 그의 계산기는 고장이 났습니다. 절대 손익을 따지지 못합니다. 마치 잃은 양을 찾아 잔치를 벌이는 목자처럼, 한 드라크마를 찾아 잔치를 벌이는 여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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