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검색

20220223 [새벽묵상] 하나가 주는 기쁨 | Joy of One (눅/Lk15:1~10)



15: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1 Now the tax collectors and sinners were all drawing near to hear him.

15: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2 And the Pharisees and the scribes grumbled, saying, “This man receives sinners and eats with them.”

15: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3 So he told them this parable:

15:4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4 “What man of you, having a hundred sheep, if he has lost one of them, does not leave the ninety-nine in the open country, and go after the one that is lost, until he finds it?

15:5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5 And when he has found it, he lays it on his shoulders, rejoicing.

15:6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6 And when he comes home, he calls together his friends and his neighbors, saying to them, ‘Rejoice with me, for I have found my sheep that was lost.’

15: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7 Just so, I tell you, there will be more joy in heaven over one sinner who repents than over ninety-nine righteous persons who need no repentance.

15:8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8 “Or what woman, having ten silver coins, if she loses one coin, does not light a lamp and sweep the house and seek diligently until she finds it?

15:9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9 And when she has found it, she calls together her friends and neighbors, saying, ‘Rejoice with me, for I have found the coin that I had lost.’

15: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10 Just so, I tell you, there is joy before the angels of God over one sinner who repents.”


 


누가복음 15장은 잃은 양 비유(4~7), 잃은 드라크마 비유(8~10), 탕자의 비유(11~32) 세가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비유들은 오직 누가복음에만 등장하는 비유입니다.

마태는 잃은 양 비유를 기록하고 있지만 훨씬 간단하게 기록합니다(마 18:12~14).

항상 소외되고 연약한 자들에 관심이 많았던 누가는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왔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죄인의 대명사로 취급 받았던 세리들이 오직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나왔다는 사실이 많은 도전을 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함께 먹고 마시며 교제를 나눴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음식을 함께 먹는 것은 서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죄인을 영접하고 받아들인다고 불평하며 수군거렸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본문에 등장하는 세가지 비유를 말씀 하신 것입니다.

사실 이 세가지 비유는 하나의 교훈을 줍니다. 그래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먼저 비유의 대상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본문의 비유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합니다. 비유는 100% 일치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비유에서 메인 아이디어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한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합니다.

다른 하나는 세가지 비유 모두 뭔가를 잃어 버립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자는 잃어버린 것을 열심히 찾고, 그것을 찾은 후에는 기쁨의 잔치를 벌입니다.



하나의 소중함

오늘 본문인 잃어버린 양과 드라크마의 비유는 동일한 비유입니다. 이에 비해서 탕자의 비유는 좀 더 심화된 비유입니다. 탕자의 비유에 대해서는 내일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의 첫째 비유는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 나서 찾아 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잔치를 벌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비유에 대해서 여러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양 아흔 아홉 마리는 누구이며, 잃어버린 하나의 양은 누구인가?

왜 목자는 아흔 아홉 마리를 그냥 들에 두고 한 마리를 구하러 갔을까?

한 마리 잃은 양을 찾은 것 때문에 잔치를 하면 금전적으로 더 손해가 아닌가?



예수님의 해석을 들어보면 그 해답을 알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은 죄인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잃은 양을 찾는 다는 것은 죄인이 회개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혹자는 아흔 아홉 마리 양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라고 해석하지만, 개인적으로 꼭 그렇게 해석할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7절과 10절을 오버랩 해서 읽어보면 회개할 것 없는 아흔 아홉(7)이 하나님의 사자들(10) 이라는 결론이 납니다.

그러므로 99는 천국을 완성할 의인의 숫자에서 하나가 모자란 것을 의미합니다.

99라는 숫자는 완전한 숫자에 하나가 모자라는 숫자입니다.

그 불완전 99를 완전한 100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하나 라는 숫자입니다.

그래서 그 잃어버린 하나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잃어버린 하나는 모든 죄인들입니다.

세리나 창녀뿐 아니라, 지금 이 비유를 듣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 역시 하나님께는 잃어버린 한 마리 양입니다. 결국 이 비유는 하나하나 대입을 해서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찾기보다는 핵심적인 교훈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소중함입니다. 곧 하늘나라를 완전하게 할 마지막 퍼즐인 한 영혼의 소중함 말입니다.



이러한 메인 아이디어는 드라크마 비유에서 더욱 확실해 집니다. 한 여인에게 드라크마가 열 개가 있습니다. 만일 이 비유를 하나하나 대입하면서 해석하면, 잃어버리지 않은 아홉 개의 드라크마가 누구인가?라는 쓸데없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드라크마는 고대 그리스의 화폐 단위로 지금도 그리스의 현대 화폐 단위로 쓰입니다.

당시 로마의 화폐 단위인 데나리온과 동일한 가치로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은전입니다.

열 개의 드라크마 어떤 여자라는 상황 설정은 그 열 개의 드라크마가 당시 혼수품으로 가져온 귀한 결혼의 상징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오늘날로 치자면 결혼 반지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귀한 혼수품을 완성 시키는 열 개의 은전 중에서 마지막 하나의 드라크마를 잃어버렸으니 어찌 여인이 그것을 찾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고 나서, 오히려 그것보다 더 많은 비용을 들여서 벗과 이웃을 불러 잔치할 수 밖에 없는 그 여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쁨

이 두 비유에서 가르치는 핵심적인 나머지 교훈 한가지는 하나님 나라의 기쁨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너무도 기뻐하십니다. 이 기쁨은 손익 계산을 따지는 기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인의 회개를 위해서는 어떤 대가도 지불하실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이사야 선지자는 다음과 같이 예언 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는 이사야의 표현은 오늘 본문에서 잃어버린 양을 어깨에 메고 기쁨으로 돌아오는 목자의 모습을 상기 시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보혈로 회개하고 돌아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너무도 귀하고 소중하게 여깁니다. 무엇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뻐하십니다.

그가 세리든 창녀든, 서기관이나 바리새인이든 어서 돌아오라고 외치십니다!

예수님이 그토록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다그치셨던 이유도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이 아닐까요?

죄인인 바리새인, 서기관, 그리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스바냐 선지자의 노래로 대신합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습 3:17)

3 Comments


Yeong Chai
Yeong Chai
Feb 23, 2022

렘브란트의 돌아 온 탕자 그림 너무 잘 봤습니다. 빨간 홍포를 걸치고 눈을 감은 인자한아버지 주님의 모습. 아들의 어깨에 얹은 오른손은 부드러운 여자의 손, 왼손은 강인한남자의 손, 누더기 옷과 아무렇게나 깍은 머리와 닳아 빠진 신발을 신은 나의 모습. 제일밝게 그린 오른손… 감사합니다. 넘 좋아요.

Like
Yeong Chai
Yeong Chai
Feb 25, 2022
Replying to

Lost Lamb 삽화를 다시 보니 너무 쓸쓸합니다. T자 높은 곳에서 예수님을 등지고 세상을 보고있는 양의 모습, 멋있는 것 같아도 춥고 어둡고 외로워 보였습니다. 태양이 떠오르는 먼 곳에서 양을 향하여 걸어가시는 예수님 모습은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세상 일에 너무 바빠서 예수님을 잊고 사는 우리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요. 예수님이 앞서 가고 그 뒤를 양들이 따라 갈 때 태양이 떠오르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우리 교회 모습…이면 좋겠네…

Like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