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검색

20220204 [새벽묵상] 제자의 우선순위 | Disciple's Priority (눅/Lk 9:51~62)



9:51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51 When the days drew near for him to be taken up, he set his face to go to Jerusalem.

9:52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를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더니

52 And he sent messengers ahead of him, who went and entered a village of the Samaritans, to make preparations for him.

9:53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하는지라

53 But the people did not receive him, because his face was set toward Jerusalem.

9:54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54 And when his disciples James and John saw it, they said, “Lord, do you want us to tell fire to come down from heaven and consume them?”

9:55 예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55 But he turned and rebuked them.

9:56 함께 다른 마을으로 가시니라

56 And they went on to another village.

9: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57 As they were going along the road, someone said to him, “I will follow you wherever you go.”

9: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8 And Jesus said to him, “Foxes have holes, and birds of the air have nests, but the Son of Man has nowhere to lay his head.”

9: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59 To another he said, “Follow me.” But he said, “Lord, let me first go and bury my father.”

9: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0 And Jesus said to him, “Leave the dead to bury their own dead. But as for you, go and proclaim the kingdom of God.”

9: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1 Yet another said, “I will follow you, Lord, but let me first say farewell to those at my home.”

9: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62 Jesus said to him, “No one who puts his hand to the plow and looks back is fit for the kingdom of God.”


 


이제 전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는 남한과 북한뿐입니다. 속히 통일이 되어 같은 민족간에 자유롭고 활발한 왕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지만, 우리의 바램이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요즘도 연일 동해상에 다양한 종류의 미사일을 쏘아 올리는 북한의 태도를 볼 때 남북 평화통일은 신기루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통일을 원하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오랜 시간의 분단은 한 민족을 너무 이질적인 두 민족으로 나누어 버렸습니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차라리 남한과 북한이 서로 독립적인 국가로 인정하고 문화나 산업, 관광의 자유로운 교류가 이루어지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나을 듯 합니다. 물론 안전이 보장 되는 것을 전제로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이나 역사적으로 기록된 이스라엘을 보면 우리나라와 굉장히 비슷한 부분이 많습니다.

이스라엘의 세 번째 왕인 솔로몬 이후에 이스라엘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나뉩니다.



남유다는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 북이스라엘은 나머지 10지파가 모여서 각각의 국가를 이루었습니다.

남유다는 왕국의 정통성을 가지고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어 통치합니다.

반면에 북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신하였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 왕이 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은 누구나 일년에 세 차례 성전이 있는 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예배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다를 왕래하다가 자신을 배신하고 정통성 있는 다윗 왕가 후손인 르호보암을 따르게 될 것을 두려워합니다. 결국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 지역인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세우고는 이것이 너희를 출애굽 시킨 너희의 신이라며 백성을 현혹하여 범죄하게 합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러한 우상숭배의 범죄로 인해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합니다.



북이스라엘을 점령한 앗수르 왕은 사마리아로 수많은 이방인들을 이주시켜 이스라엘과 혼혈족을 만들고, 이주한 이방인들과 함께 유입된 모든 종교를 허락하여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는 여호와도 섬기고 각종 다양한 우상도 섬기는 혼합종교의 국가가 되었던 것입니다(왕하 17:24~33).

그래서 상대적으로 유대 순수혈통을 지닌 남유다 사람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개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예배의 장소가 예루살렘인지 사마리아의 그리심 산인지를 물은 것도 이와 같은 역사적인 배경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갈릴리와 같은 북쪽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향해 갈 때 사마리아를 거치게 되는데, 서로의 관계가 이렇다 보니 사마리아를 거치지 않으려고 주로 요단강을 건너서 동쪽 지역인 베레아 지역으로 이동한 후 예루살렘 근처에 이르러 다시 요단강을 건너와 여리고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들어갔습니다.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예수님 (51~56절)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십자가를 지시기로 굳게 결심하고 출발합니다. 가는 길의 여정도 사마리아를 거쳐 가시려 합니다. 열두 명의 제자와 함께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먼저 선발대를 보내서 숙식을 예약하고자 했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약을 받았다가도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간다는 말을 듣고는 예약을 일방적으로 취소 해버렸습니다.

아마도 선발대가 야고보와 요한 두 형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우레의 아들(보이너게)이라는 별명답게 화를 내며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54) 라고 여쭙니다. 이것은 엘리야 선지자를(왕하 1:9~15) 코스프레 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엘리야보다 더 큰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오랜 상처를 지닌 사마리아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간 것도 그와 같은 마음에서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지만, 그 공의는 사랑을 전제로 한 공의입니다.

원수인 니느웨 사람들의 멸망을 바라던 요나 선지자에게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습니다.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욘 4:11)


이것이 요나서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요일 4:16).


멀고 험한 제자의 길 (57~62절)

이제부터 누가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길에서 벌어진 일들을 기록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나와 어디를 가시든지 따를 것을 고백합니다(57). 마태는 그가 서기관(마 8:19)이라고 밝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 하십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이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이유를 간파하신 것 같습니다.

매슬로우는 생리적 욕구와 안전의 욕구를 가장 기본적인 1, 2단계 욕구로 구분합니다.

음식과 집 같이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보호할 수 있는 것들을 본능적으로 추구합니다.

하지만 제자의 길은 이러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보다 우선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장례를 먼저 허락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유대인들에게 부모의 장례는 그 어떤 일보다 우선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장례를 위해서는 기도도 멈출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의 장례를 제대로 치러야 유산을 상속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부모를 장례 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제자의 길은 이러한 가장 기본적인 윤리보다 우선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합니다. 하지만 가족들과 이별 인사를 나누도록 허락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엘리야는 엘리사를 후계자로 부르며 부모와 작별할 것을 허락합니다(왕상 19:19~20).

하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62) 하십니다. 이처럼 제자의 길은 가장 기본적인 감정들 보다 우선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예수님의 모습은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과 같다는 느낌을 줍니다. 물론 본문에서 말씀 하신 주님의 말씀은 산상수훈처럼 일종의 과장법입니다. 그렇다고 문자 그대로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제자들의 자세는 그 어떤 욕구나 윤리나 감정들 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오히려 말씀하신 상황보다 더한 경우라도 예수를 따르는 것을 먼저 택하는 것이 참 제자도입니다.

어떻습니까? 제자의 길이 쉽습니까? 아닙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따를 수 없을 것 같은 길이 제자의 길입니다. 하지만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눅 18:27).

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내 심령에 있는 욕구, 윤리, 감정의 부차적인 것들을 정돈하고, 제자로서 우선순위를 확실하게 다시 세우는 참 그리스도의 제자 되기를 원합니다.


1 Comment


Yeong Chai
Yeong Chai
Feb 04, 2022

Only Jesus!

Like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