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Birth of Jesus Christ
2: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1 In those days a decree went out from Caesar Augustus that all the world should be registered.
2: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2 This was the first registration when Quirinius was governor of Syria.
2: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3 And all went to be registered, each to his own town.
2: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4 And Joseph also went up from Galilee, from the town of Nazareth, to Judea, to the city of David, which is called Bethlehem, because he was of the house and lineage of David,
2:5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5 to be registered with Mary, his betrothed, who was with child.
2: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6 And while they were there, the time came for her to give birth.
2:7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7 And she gave birth to her firstborn son and wrapped him in swaddling cloths and laid him in a manger, because there was no place for them in the inn.
여유 없는 인생
오늘 본문은 조금이라도 교회를 다니신 분들은 너무도 잘 아는 내용입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예수님의 부모님인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 신고하러 베들레헴에 갔다가 마구간에서 아이를 낳았다. 끝!
여기서 말하는 마구간은 우리가 흔히들 상상하는 서구적인 마구간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당시 중동지역 마구간은 석회암지대를 파서 만든 동굴이라는데 의견을 같이 합니다.

그러면 왜, 마리아와 요셉은 그러한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아야 했나요? 답은 간단합니다.
본문에 보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7)입니다. 여관에 방이 없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장 높은 자 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이사 아구스도)의 명을 따라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을 관할하는 수리아의 총독 구레뇨 때(B.C.8)에 호구 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탄생은 B.C.4 년이기에 연대적인 문제가 있는 구절입니다. 하지만 호구조사가 오늘날처럼 단 시일 내에 이루어지지 않는 점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입니다.
어쨌든 호구조사는 세금징수와 징병을 위해서 아우구스투스 때부터 정기적으로 행해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호구 조사를 위해서 사람들은 각자의 고향, 정확히 말하면 재산신고가 되어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갱신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동네라고 불리는 베들레헴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돌아오게 되었고, 덕분에 호텔마다 방이 부족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진짜 방이 부족한 이유 때문에만 마리아와 요셉이 마구간에서 출산을 해야 했을까요? 만일 그 태어날 아기가 유대인들이 가장 기다리는 다윗과 같은 왕, 즉 메시아라는 것을 알았다면? 아마 상황은 달라졌겠죠?
하지만 오늘 말하고 싶은 부분은 왕을 알아보지 못하는 영적인 무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그들이 만삭인 임산부를 추운 날씨 가운데 동굴에서 신생아를 낳도록 방치했다는 그 사실입니다. 사실 임산부는 모든 것에서 우선 순위가 있지 않은가요?
심지어 그들은 다 한 족속인 유다가문으로서 가깝거나 먼 친척 관계인 사람들입니다.
물론 그들도 이해는 됩니다. 먼 길을 온 사람들, 피곤, 힘들고, 지쳤고, 귀찮고, 손해보고 싶지 않고, 기득권을 포기하기 싫고… 상황은 이해가 됩니다만 의미 있는 인생은 가치가 상황보다 우선해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리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가치보다는 상황에 더 많이 수긍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제가 S 커피를 좋아합니다. 그들의 철학보다는 커피 맛을 좋아합니다. 영어를 못하는 사람에게 미국 식당에서 처음 음식을 시키는 것은 공포입니다. 이민 초창기에 그냥 아메리카노를 시키니까 바리스타가 물어봅니다. You want room? 아니 커피집에서 왠 room? 어법도 틀린 것 같고…

나중에 알고 봤더니 커피에 크림 넣을 공간으로서 Room이 필요한지를 묻는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Do you want room for cream & sugar? 의 간략화된 캘리포니아 버전의 영어라고 하더군요.
커피 컵에 여유가 있어야 크림을 넣을 수 있듯 사람의 마음에도 여유, 즉 room이 있어야만 양보, 사랑, 격려를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마리아를 밖에 재운 이유는 그들의 마음에 여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곳간(음식창고)에서 인심(선행, 도움)난다 라는 말이 바로 이 경우를 말하는 것이죠.
하지만 우리네 인생은 너나 할 것 없이 여유가 없습니다.
이 여유가 없는 이유가 눈에 보이는 것들(돈, 교육, 건강, 시간 등)에만 기인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러한 것들에 꽤 영향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인생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부터 인생의 여유가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각박한 것입니다.

방이 많으신 그 분에게 나아가라!
그럼 어떻게 우리 인생이 잃어버린 그 여유를 되찾을까요? 요한복음 13:36~14:6 을 보면, 베드로가 쿼바디스 도미네, 곧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질문하고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장담하자 예수님은 그에게 지금은 못 따라오지만 후에는 따라온다는 예언의 말씀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지금은 안되고 나중에 된다고 말씀하실까요?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지금과 그 나중 사이에 일어날 일 때문입니다. 바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요 14:2) 입니다.
지금 당장 예수님을 위해서 죽기까지 따르고 싶은 마음이 진심이지만, 마음에 “여유”가 없기에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지시고 거처(Room)을 예비하신 후에는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도대체 그 거처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사람이 바뀔 수 있을까요? 신약성경에서는 거처 는 헬라어로 모네 μονὴ라는 단어인데 요 14:2 과 23절 두 군데에서만 사용했습니다. 결국 모네, 거처 즉 방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 자체가 바로 새 성전이고 거처이고 방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집엔 방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넘치고 넘쳐 무한합니다!
여유를 잃어버린 우리 인생이 다시 그 Room을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에게 그 여유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서는 머릴 둘 곳조차 없으셨던, 그러나 방이 많으신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2015년 말, 시애틀 이사준비로 분주할 때 엘에이로 급히 나가는 차 안에서 비는 내리는데 마음에 평안이 없고, 뭔가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감에 죽을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정말 복이 터진 상황인데도 뭔지 모를 불안감이 엄습한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찬양 하나가 입에서 흘러나옵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20분 정도를 펑펑 울면서 하나님 앞에 찬양을 했고, 짓누르던 어깨가 풀리는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담임목사님의 우산을 벗어나서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는 위치, 책임감, 중압감 등으로 내 마음에 Room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여유를 잃어버립니다. 이러다 시집(장가) 못 가는 거 아니야?! 이러다 사업 망하는 거 아니야?! 이러다 직장 못 구하는 거 아니야?! 이러다 대학 못 가는 거 아니야! 이러다 늙으면 어떡하지?! 노후는?! 이러다 병 걸리는 거 아니야?! 이러다 죽는 것 아니야?!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염려가 아니라 평강입니다! 여유입니다!
그 평화는! 그 평강은! 그 여유는!! 오직 예수와 함께 거할 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평강!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할 때 2022년도 평강이 넘치는 한 해가 될 것입니다. 올 한해 예수로 말미암아 Room이 넘쳐나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