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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17 [새벽묵상] 고통에는 뜻이 있다 | Pain has meaning (욥/Job 36:1~15)



36:1 엘리후가 말을 이어 이르되

Elihu continued:

36:2 나를 잠깐 용납하라 내가 그대에게 보이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을 위하여 아직도 할 말이 있음이라

“Bear with me a little longer and I will show you

that there is more to be said in God’s behalf.

36:3 내가 먼 데서 지식을 얻고 나를 지으신 이에게 의를 돌려보내리라

I get my knowledge from afar;

I will ascribe justice to my Maker.

36:4 진실로 내 말은 거짓이 아니라 온전한 지식을 가진 이가 그대와 함께 있느니라

Be assured that my words are not false;

one who has perfect knowledge is with you.

36:5 하나님은 능하시나 아무도 멸시하지 아니하시며 그의 지혜가 무궁하사

“God is mighty, but despises no one;

he is mighty, and firm in his purpose.

36:6 악인을 살려두지 아니하시며 고난받는 자에게 공의를 베푸시며

He does not keep the wicked alive

but gives the afflicted their rights.

36:7 그의 눈을 의인에게서 떼지 아니하시고 그를 왕들과 함께 왕좌에 앉히사 영원토록 존귀하게 하시며

He does not take his eyes off the righteous;

he enthrones them with kings

and exalts them forever.

36:8 혹시 그들이 족쇄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But if people are bound in chains,

held fast by cords of affliction,

36:9 그들의 소행과 악행과 자신들의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he tells them what they have done—

that they have sinned arrogantly.

36:10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나니

He makes them listen to correction

and commands them to repent of their evil.

36:11 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 형통한 날을 보내며 즐거운 해를 지낼 것이요

If they obey and serve him,

they will spend the rest of their days in prosperity

and their years in contentment.

36:12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 칼에 망하며 자식 없이 죽을 것이니라

But if they do not listen,

they will perish by the sword

and die without knowledge.

36:13 마음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은 분노를 쌓으며 하나님이 속박할지라도 도움을 구하지 아니하나니

“The godless in heart harbor resentment;

even when he fetters them, they do not cry for help.

36:14 그들의 몸은 젊어서 죽으며 그들의 생명은 남창과 함께 있도다

They die in their youth,

among male prostitutes of the shrines.

36:15 하나님은 곤고한 자를 그 곤고에서 구원하시며 학대당할 즈음에 그의 귀를 여시나니

But those who suffer he delivers in their suffering;

he speaks to them in their affliction.


 

옥한흠 목사님의 책 중에 고통에는 뜻이 있다 라는 책이 있습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생전에 고통에 관하여 설교한 것을 모은 설교집입니다. 책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고난의 원인보다는 고난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서 알려주는 귀한 책입니다. 내용 중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금을 제련하여 정금을 만들기 위해서 대장장이는 자신의 얼굴이 비춰질 때까지 금을 때리고 또 때립니다.

하나님 역시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비춰지기를 원하십니다. 바로 고난은 대장장이의 망치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은 바로 이러한 대장장이의 다루시는 손에 올려진 자들이었습니다.

요셉, 모세, 다윗 등등 그들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밤의 노래를 부른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 밤의 노래, 곧 광야와 같은 인생길에서 고난 가운데 부르는 그 노래가 바로 십자가의 노래입니다.

결국 선하신 대장장이의 손에 올려진 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형상이 비춰질 때 비로소 그들은 고난과 고통의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난 당하는 것이 유익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율례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엘리후의 네 번째 변론의 서론 (1~4절)

엘리후는 네 번째 변론을 합니다. 이 변론은 37장까지 이어집니다.

내용상 구분을 해보면 1~4절은 서론이고, 5~25절에서는 고난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 아닌, 오히려 당신의 백성의 교만을 꺾기 위한 회개의 수단이라는 것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37:26~37:24절에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언급하며 그 누구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의 당위성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엘리후는 이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명예를 위하여 다시 한 번 말하겠다고 양해를 구합니다(2).

하지만 누가 감히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 대신 변호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70인역LXX하나님을 위하여 대신 내게 라고 번역하여, 아직도 내 안에 말이 남아 있다 라고 완곡하게 번역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이처럼 본 구절을 완곡하게 번역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래 그 의미는 엘리후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위하여 변호할 말이 남아있다는 의미입니다.


한편 엘리후는 자신의 지식을 매우 확신하고 있습니다. 먼 데서 지식을 얻었다는 것은 자신의 지식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의 완곡한 표현입니다. 또한 나를 지으신 이에게 의를 돌려보내리라(3)는 자신이 하나님의 순전성을 입증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온전한 지식을 가진 이가 그대와 함께 있느니라(4)라는 표현은 그의 자신감을 드러내 보입니다.

여하튼 옛날이나 현대나 젊은이들은 당돌하고 당찬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겸손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에 대한 전문가를 자처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자신감은 있어 보이지만, 결코 친해지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혹시 나는 아닌지??



고난에 대한 엘리후의 해석 (5~15절)

이제 엘리후는 하나님과 고난에 대한 관계를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지만, 피조물인 인간을 멸시하지 않는 분이십니다(5). 악인은 멸하시지만, 고난 받는 의인에겐 공의를 베푸십니다(6).

하나님은 그 눈을 의인에게서 떼지 않으시고, 그를 영원토록 존귀하게 하십니다(7).

여기서 욥의 세 친구들과 엘리후의 차별점이 있습니다. 적어도 엘리후는 의인도 고난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혹시 그들이 족쇄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8) 이라는 표현이 바로 의인의 고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이 의인들에게 주시는 고난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들의 소행과 악행과 자신들의 교만한 행위를 알게 하시고,

그들의 귀를 열어 교훈을 듣게 하시며 명하여 죄악에서 돌이키게 하시나니(9~10)


이는 시편 기자가 고백한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 119:71)라는 고백하고도 너무 잘 맞는 신학입니다. 고난은 우리의 죄를 알게 하시고, 하나님의 교훈을 듣게 하시며, 죄의 길에서 우리를 돌이키게 합니다.

하지만 엘리후의 이런 신학적 해석에는 이미 욥의 고난의 원인이 그들의 소행과 악행, 교만한 행위와 죄악 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스스로 자신의 고난의 유익을 고백했다면, 욥은 엘리후와 세 친구들에 의해 고난의 원인이 죄악 때문임을 고백하라고 고문 당하고 있다는 것이 차이점입니다. 엘리후는 이어서 두 갈래 길을 제시합니다.



만일 그들이 순종하여 섬기면…(11)과 만일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면…(12) 입니다.

그 결과는 불 보듯 뻔합니다. 이미 구약 모세오경에서 모세를 통하여 수 차례 말씀 하신 바입니다.

순종의 결과는 형통한 날을 보내고 즐거운 해를 지내며, 곤고함에서 구원하시고, 간구에 귀를 기울이실 것입니다.

반면에 불순종의 결과는 칼에 망하며, 지식 없이 죽을 것이고, 그들의 몸은 젊어서 죽으며, 그들의 생명은 남창들의 운명과 같을 것입니다. 여기서 남창에 해당하는 원어는 바 케데쉼 בקדשים인데, 본래 거룩함, 구별됨, 성스러움 이라는 의미의 코데쉬에서 파생된 것으로 남자 창기를 의미합니다. 본래 거룩한 자를 가리키는 코테쉬가 남창을 의미하게 된 것은 이교 사원의 종교적인 제도 때문입니다. 거룩하게 구별된 사제들이 이방신들에게 제사하는 방식이 난잡한 성적인 행위임을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교도들의 신전에는 이처럼 남자나 여자 사제가 머물며 성적인 행위를 통해서 신들을 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별된 거룩한 자라는 의미가 남자 창기를 뜻하는 단어가 된 것입니다. 안타까운 스토리입니다.



인생에 드리우는 고난이나 고통은 여러 요인들에 의해 발생합니다.

스스로의 실수나 죄 때문일 수도 있고, 사탄의 시험일 수도 있습니다. 때론 욥처럼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이 닥칠 수도 있으며, 수많은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비로소 고난의 진짜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제3자가 당신이 고난을 당하는 것이 죄 때문이야 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초신자나 아직 삶을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약한 성도들을 성숙한 성도들이 도와 고난의 영적인 의미를 해석해 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조심스러운 작업입니다.

분명한 것은 고난의 목적입니다. 고난의 목적은 반드시 선합니다. 하나님은 자녀의 고통을 허투루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눈물과 고통의 아픔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지금은 힘들고 어렵지만, 하나님은 나의 고난을 사용하시어 나를 정금같이 아름답게 하실 것입니다.

고통에는 뜻이 있습니다. 힘을 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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