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검색

20211115 [새벽묵상] 하나님과 인간 | God & Man (욥/Job 25:1~6)



25:1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25:2 하나님은 주권과 위엄을 가지셨고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느니라

25:3 그의 군대를 어찌 계수할 수 있으랴 그가 비추는 광명을 받지 않은 자가 누구냐

25:4 그런즉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

25:5 보라 그의 눈에는 달이라도 빛을 발하지 못하고 별도 빛나지 못하거든

25:6 하물며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이랴


욥기 25장은 수아 사람 빌닷의 세 번째 변론입니다.

빌닷을 수아 사람이라고 기록하는데, 수아는 아브라함이 낳은 아들 중 하나입니다.



아브라함이 후처를 맞이하였으니 그의 이름은 그두라라
그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고 (창 25:1~4)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빌닷과 에서의 후손인 에돔 지역의 사람으로 보이는 욥은 묘한 먼 형제의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관계도 그의 발언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빌닷의 세 번째 변론의 특이한 점은 그 내용이 아주 짧다는 것입니다. 또한 소발의 세 번째 변론은 없습니다.

아마도 빌닷이나 소발은 의인은 형통하고, 악인은 망한다는 명제가 반드시 일치 하지 않는다는 욥의 주장을 반박할 논리가 떨어졌을 것입니다. 더 이상 말해봤자 소용없다 라고 포기하는 심정입니다.

할 말도 없고요.

또한 빌닷의 주장은 더 이상 새롭지 않습니다. 그저 했던 말의 반복이고, 엘리바스의 논지(22장)를 따를 뿐입니다. 했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말을 시작하자 욥은 빌닷의 말을 가로막고 26장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칩니다.



그런데 학자들 가운데에는 빌닷의 말이 근단적으로 짧은 것과 소발의 세 번째 발언 없는 것을 이유로 욥 26장의 일부가 빌닷과 소발의 발언일 것이라는 예측으로 본문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앞에도 밝혔지만, 반복되는 그들의 주장에 대해서 욥이 재빠르게 반응하여 답변한 것으로 보이며, 친구들은 소위 할 말 없음으로 욥과의 논쟁의 전의를 상실한 것으로 보입니다.

함께 논쟁을 하다가 말문이 막힐 때는 그냥 입을 닫고, 감정을 가라앉힌 후 상대방의 이야기를 곱씹어 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 23:1~17)

이러한 확신과 믿음을 고백하는 욥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빌닷은 말은 해야 하겠으니 그저 그래도 악인에게 하나님이 심판의 빛을 비출 것이며, 인간은 하나님 앞에 벌레와 같은 존재라는 상투적인 신학을 반복할 뿐입니다.

욥에게는 하나의 위로도 충고도 되지 않는 영양가 제로인 말입니다.

그럼에도 상투적인 신학을 다른 말로 바꾸자면 전통적인 신학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학은 일반적인 경우에는 매우 중요한 뼈대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신학 사상은 일반적으로 옳습니다. 다만 욥과 같은 특수한 상황은 좀 더 디테일한 하나님의 섭리와 오묘한 경륜이라는 신학으로 살펴 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주권과 위엄의 하나님 (1~3절)

빌닷은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2)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엘리바스가 주장했던 것(4:17~21; 15:14~16)에 대한 반복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이 말은 절대적으로 옳은 진리입니다.

또한 욥이 주장하는 바도 자신의 고난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가운데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빌닷은 높은 곳에서 화평을 베푸시는 하나님(2b)을 찬양합니다. 이는 온 우주의 질서를 세우시고, 천상에서 하나님을 대항하는 세력을 굴복 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천상의 존재들도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데, 하물며 미천한 인간은 당연히 하나님 앞에 굴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세의 대표적인 철학자이자 신부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표적인 저작인 신학대전 에서 여러 명의 천사가 같은 장소에 있을 수 있는가? 라는 명제를 신학교에서 논의해 볼만한 여러 명제들 중 하나로 꼽았습니다. 이것은 천사의 존재가 영적인 것인지, 물질적인 것인지를 묻는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윌리엄 실링우드William Chillingworth 는 1637년에 출간한 책 프로테스탄트 종교 에서 ‘바늘 끝 위에서 몇 명의 천사가 춤출 수 있을까?’ 로 바꿔 소개하면서 종교개혁 이전의 카톨릭 교회가 얼마나 공리공론에 빠져 쓸데없는 이야기나 했는지 공격하는 빌미로 삼았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누가 감히 하나님의 군대를 계수(3)할 수 있을까요? 또한 그 분의 광명, 곧 태양 빛에서 근원적인 그분의 영광의 빛까지, 그의 빛이 비춰지지 않는 존재는 없습니다.



구더기 같은 사람, 벌레 같은 인생 (4~6절)

4~6절은 인간의 죄성, 곧 원죄를 말하는 면에서는 옳습니다. 하지만 시편을 보면 많은 의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고, 하나님 역시 그들의 호소를 듣고 구원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초대 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사 1:18)

의인은 하나도 없고, 달이나 별빛이 하나님 앞에서는 무의미하며, 그러한 하나님과 비교하면 우리 인생은 구더기요, 벌레와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옳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우리 인생의 관계는 논리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사랑의 관계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논리를 벗어나는 관계입니다.

자연세계는 항상 열등한 존재가 우월한 존재를 위해서 희생해야 합니다. 약육강식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빌닷이 말하는 그 우월하신 비길 존재가 없는 하나님이 우리 벌레 같은 인생을 위해 죽으신 것입니다.

어찌 이것을 머리와 입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왕과 나, 곧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입니다. 빌닷은 이 깊은 신학을 몰랐던 것입니다. 왕이신 하나님만 알고,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Bildad


1 Then Bildad the Shuhite replied:


2 “Dominion and awe belong to God;

he establishes order in the heights of heaven.

3 Can his forces be numbered?

On whom does his light not rise?

4 How then can a mortal be righteous before God?

How can one born of woman be pure?

5 If even the moon is not bright

and the stars are not pure in his eyes,

6 how much less a mortal, who is but a maggot—

a human being, who is only a worm!”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