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8 땅아 내 피를 가리지 말라 나의 부르짖음이 쉴 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라
16:19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 데 계시니라
16:20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16:21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와 인자와 그 이웃 사이에 중재하시기를 원하노니
16:22 수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 할 길로 갈 것임이니라
17:1 나의 기운이 쇠하였으며 나의 날이 다하였고 무덤이 나를 위하여 준비되었구나
17:2 나를 조롱하는 자들이 나와 함께 있으므로 내 눈이 그들의 충동함을 항상 보는구나
17:3 청하건대 나에게 담보물을 주소서 나의 손을 잡아 줄 자가 누구리이까
17:4 주께서 그들의 마음을 가리어 깨닫지 못하게 하셨사오니 그들을 높이지 마소서
17:5 보상을 얻으려고 친구를 비난하는 자는 그의 자손들의 눈이 멀게 되리라
구약 성경 사사기와 사무엘상 사이에 있는, 4장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책이 있습니다. 룻기입니다.
룻기는 사사시대에 베들레헴에서 살다가 형편이 어려워지자 모압으로 이주한 엘리멜렉과 나오미 가정에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모압으로 이주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엘리멜렉이 죽고 남은 두 아들은 모압 여인들과 결혼을 합니다. 말론은 룻이라는 여인과 기룐은 오르바라는 여인과 결혼을 합니다.
하지만 모압 땅에 거한지 10년 즈음에 나오미의 두 아들도 죽고, 결국 나오미는 끝까지 자신을 따라온 룻만 데리고 자신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돌아옵니다. 결국 효부인 룻은 보아스라는 유력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합니다.
룻기에서 중요한 것은 룻과 보아스가 결혼하여 낳은 아들 오벳입니다. 오벳은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결국 이방여인 룻과 보아스의 결혼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가 열린 것입니다.
또 다른 중요한 사상은 바로 고엘제도입니다. 보아스가 룻과 결혼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고엘의 책임을 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제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가문이 끊어질 위기에서 회복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의 고엘이 되어 주시옵소서 (16:18~22)
고엘 גאל 은 되찾다, 무르다, 구속하다 라는 의미로 근족으로서 땅을 잃은 친족의 땅을 찾아주거나, 아들이 없이 죽은 형제를 대신하여 아들을 낳아주거나, 억울하게 당한 것에 대해서 복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는 근족, 기업 무를 자, 보수자 등으로 번역되었습니다(레25:25, 룻2:20, 3:9,12, 4:3, 민35:12).
결국 고엘은 가장 가까운 친족으로서 어려움 당한 자를 구해줄 의무와 권리가 있는 자를 말합니다.
한편 기업 무를 자의 자격으로는 첫째 근족이어야 합니다. 촌수가 가까울수록 먼저 의무와 책임을 져야 합니다. 둘째 자원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기업을 무를 수 있는 능력이 되어야 합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 탄식하며 자신의 고엘이 되어 주실 것을 간구합니다.
욥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자신의 피의 호소가 멈추지 않을 것을 노래(18)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동생을 죽인 가인에게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 4:10b) 라고 말씀 하신 아벨의 피의 호소를 연상케 합니다.
욥은 자신의 결백을 증언해줄 증인이자 중보자가 하늘에 계시다(19)고 소리칩니다. 욥의 신학이 대단합니다. 아무리 자신의 양심이 거리낌이 없어도 그것을 확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 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모든 인생은 죄인입니다. 그 인생이 의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유일한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칭의 하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의로움이 확증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롱하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욥의 눈은 오직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중재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여기서 좀 더 신학적으로 해석을 하자면, 사실 성부께서는 재판관으로서 공의의 판결을 하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진정한 우리의 고엘이 되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빼앗긴 기업, 곧 천국을 다시 빼앗아 돌려주신 분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끊어진 영적인 족보를 대신 이어주신 분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해를 가한 원수 사탄에게 복수해주신 보수자 되십니다.
욥은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간절히 외치고 있습니다. 나의 증인이 되어주시고, 변호사가 되어 주시옵소서!
나의 담보물이 되어 주시옵소서 (17:1~5)
욥의 기운이 쇠하였습니다. 여기서 기운은 원어로 루아흐(영)입니다. 그래서 NIV는 My spirit is broken 이라고 번역합니다. KJV은 기운을 루아흐의 또 다른 의미 중 하나인 숨 Breath 라고 번역했습니다. 영혼이 파괴되고, 숨이 멈추기 직전의 고통스런 상황을 묘사합니다.
욥은 하나님께 나에게 담보물을 주소서(3a) ערבני 아르베니 라고 기도합니다. 나의 보증이 되어 주소서! 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결백을 위한 담보물이 되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요셉이 형제들의 사랑을 테스트하기 위하여 일부로 베냐민에게 누명을 씌워 감옥에 가두자 유다가 스스로 담보물, 대속물이 되어 베냐민의 결백을 보증했던 장면을 기억하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큰 은혜를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결백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담보, 곧 대속물이 되셨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결백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곧 당신의 생명으로 우리의 보증이 되시고, 대속물이 되신 것입니다.
욥이 이 모든 신학을 알았을까요? 당연히 지금 우리가 배우고 듣는 것처럼 알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는 욥에게 성령이 역사하시어 인생의 깊이 있는 심령의 기도를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욥과는 달리 이미 우리의 대속물이 되시고 고엘이 되어주신 오신 예수님을 믿는 신약의 시대, 곧 은혜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욥처럼 원인을 알 수 없는 인생의 고난이 몰려 올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욥을 본 받아야 합니다. 사실 너무 고난이 극심하면 기도도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욥처럼 하나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그의 외침을 들어 보십시오!
청하건대 나에게 담보물을 주소서! 나의 손을 잡아 줄 자가 누구리이까? (17:3)
날마다 주님께 이 믿음의 기도를 드립시다.
결국에는 우리의 손을 잡아주실 주님만 바라봅시다.
16:18 “Earth, do not cover my blood;
may my cry never be laid to rest!
19 Even now my witness is in heaven;
my advocate is on high.
20 My intercessor is my friend
as my eyes pour out tears to God;
21 on behalf of a man he pleads with God
as one pleads for a friend.
22 “Only a few years will pass
before I take the path of no return.
17:1 My spirit is broken,
my days are cut short,
the grave awaits me.
2 Surely mockers surround me;
my eyes must dwell on their hostility.
3 “Give me, O God, the pledge you demand.
Who else will put up security for me?
4 You have closed their minds to understanding;
therefore you will not let them triumph.
5 If anyone denounces their friends for reward,
the eyes of their children will f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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