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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08 [새벽묵상]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마/mT 11:20-30)



(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화 있을진저 회개하지 않는 자여! (20-24절)

예수님의 주 도시는 가버나움이었습니다. 갈릴리를 중심으로 주변 도시들에 수많은 권능을 행했지만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자, 예수님의 노골적으로 그들을 책망하시는 장면입니다.

오늘 사건은 눅 10:12-15에도 등장합니다. 누가는 70인 전도대를 파송하는 전후에 이 말씀을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마태는 연대기적 순서로 말씀을 기록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교훈적 의미를 가지고 사건 순서를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가 사용하는 그 때에 는 어떤 시간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권능을 행한 동네들이 회개하지

않은 바로 그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부터 예수님의 대적자와 반대자들에 대한 공개적인 질책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책망하는 것은 가버나움과 고라신, 벳새다에 행한 그 많은 권능을 두로와 시돈, 소돔과 고모라에 행했다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을 것이라는 겁니다. 결국 마지막 심판 날에는 구약을 대표하는 죄악의 도시 두로와 시돈, 소돔과 고모라가 신약을 대표하는 가버나움, 고라신과 벳새다 보다 견디기 쉬울 것입니다.

여기서 얻는 첫 번째 교훈은 권능, 곧 이적이 회개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본 도시 임에도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결코 이적이 우리에게 회개와 믿음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 교훈은 구원과 심판은 같이 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권능, 이적은 은혜요 구원의 선포입니다. 이적이 일어나는 것은 엄청난 은혜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믿음으로 결부시키지 못하면, 동시에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이 됩니다.

늘 그렇듯이 하나님의 구원, 은혜와 심판, 저주는 항상 같이 움직입니다.

세 번째 교훈은 반드시 마지막 심판의 날이 온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심판이 선포되었지만, 아직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명심해야 하는 것은 이미 선포된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 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마지막 종말의 날, 여호와의 날이 임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네 번째 교훈은 심판에도 차등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반드시 많은 은혜를 베풀었던 곳에는 심판도 크다는 것입니다.

가버나움과 주변 도시는 예수께서 베푸신 권능, 이적의 은혜에 합당한 반응을 보였어야 합니다.

합당한 반응은 무엇인가요? 회개입니다. 그리고 그 회개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출발입니다.

한마디로 믿음이 없어, 회개하지 못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지 못하는 사람/동네는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권능/이적을 본 후에 가장 모범적인 반응은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라고 고백한 사도 베드로의 반응입니다.

더 이상 무슨 변명이나,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이적을 통하여 하나님이신 예수의 정체를 보게 되면, 그저 나의 죄만이 보일 것입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자가 구원의 은혜까지 누리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25-30절)

마태는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라고 다소 특이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그 때에 는 시간적인 표현이라기 보다는 앞뒤 문맥을 이어주는 접속사 기능입니다.

25절의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 은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을 비롯하여 가버나움, 고라신, 벳새다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이적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는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모든 자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숨기셨다 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적 세계에 대한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깨닫지 못하도록 막으신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자신의 아집과 고집으로 예수를 보아도 믿지 않는 악한 마음 그대로 내버려 두신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 은 어린 아이와 같은 부족한 자들, 순진한 자들, 하나님 의존적인

자들을 의미하며, 본문에서 보잘것없는 제자들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를 믿는 모든 자를 말합니다.

나타내심 역시 주권적인 하나님 사역에 대한 영적인 표현입니다.

우리의 의지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나타내심, 비추어주심이 없이는 결코 인간 스스로 예수를 알 수도, 믿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타내심 에 대해서 예수께서 감격하며, 감사 찬양을 올리는 것(25b절)입니다. 오직 아버지 하나님의 뜻 만이 설 것입니다. 그것이 정의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사랑의 초청이 선포 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우리 인생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표현입니다. 수고롭고, 무거운 짐을 진

실제로 아담의 범죄로 고단한 노역의 인생, 출산(육아, 삶)의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을 말합니다. 거기에 가장의 짐, 주부의 짐, 자녀의 짐, 출세의 짐, 명예의 짐 등등 수많은 짐을 지고 다리가 후들후들 거릴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인간의 보이지 않는 죄의 짐까지도 스스로 지고 해결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고스럽고, 피곤하고, 고단한 인생입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나님의 은혜는 차별이 없습니다. 단, 주께 오기만 하면 됩니다. 온다는 것은 은혜의 자리로 나오는 것, 기도, 예배, 말씀을 사모하는 것, 예수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주께서 그러한 자에게 쉼을 주십니다. 진정한 안식의 근원이 어디인지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은 현재적임과 동시에 종말론적인 안식을 의미하는 이중적 의미를 갖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계시와 진리의 말씀을 듣고 배워야 합니다. 나의 멍에 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짐을 지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적인 연합을 통해서 주께서 내 짐을 대신 지시고, 나는 주님의 짐을 지는데, 그것 역시 주님이 지는 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로소 마음의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죄의 노예가 아닌 자유함을 누림으로 영혼의 쉼을 얻는 것이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주님이 대신 짐 지시니, 예수님의 짐은 가벼울 수 밖에 없습니다!

이 비밀을 깨달은 어거스틴은 이 짐은 하늘을 날 수 있는 날개가 된다 라고 말했습니다.

수많은 짐과 수고가 가득한 인생입니다. 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들은 법을 잘 다듬고, 정비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인생의 모든 수고와 짐이 모두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생의 수고와 짐이 사라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안되었다면 우리가 예수께 가면 됩니다.

바로 지금이 인생의 모든 수고와 무거운 짐을 예수 앞에 내려놓을 때인 것입니다.


 

Woe on Unrepentant Towns


20 Then Jesus began to denounce the towns in which most of his miracles had been performed, because they did not repent. 21 “Woe to you, Chorazin! Woe to you, Bethsaida! For if the miracles that were performed in you had been performed in Tyre and Sidon, they would have repented long ago in sackcloth and ashes. 22 But I tell you, it will be more bearable for Tyre and Sidon on the day of judgment than for you. 23 And you, Capernaum, will you be lifted to the heavens? No, you will go down to Hades. For if the miracles that were performed in you had been performed in Sodom, it would have remained to this day. 24 But I tell you that it will be more bearable for Sodom on the day of judgment than for you.”


The Father Revealed in the Son


25 At that time Jesus said, “I praise you,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because you have hidden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learned, and revealed them to little children. 26 Yes, Father, for this is what you were pleased to do.


27 “All things have been committed to me by my Father. No one knows the Son except the Father, and no one knows the Father except the Son and those to whom the Son chooses to reveal him.


28 “Come to me, all you who are weary and burdened, and I will give you rest. 29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for I am gentle and humble in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 souls. 30 For my yoke is easy and my burden is 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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