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수 천 년 동안 성경이 지향하고 달려온 클라이막스 장면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복음서 독자들은 적잖은 당혹감을 느낍니다. 사건의 중요성에 비하면 복음서마다 그 장면을 너무 간략하게 사실만을 기록하고 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흔한 초대교회의 감격의 찬송시나 회개의 신앙고백 하나 없이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십자가 사건에 대한 감격이나 해설은 일체 배제하고 한결 같이 객관적인 사실만을 기록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십자가 사건은 더욱 사실적이고 객관적이 됩니다.
이것은 성경의 원저자인 성령의 특별한 인도하심입니다. 십자가 사건의 감격이나 해설은 사도행전,
베드로 전후서와 같은 다른 성경에 베드로나 바울에 의해 기록됩니다.
복음서의 역할은 마치 뉴스처럼 십자가 사건의 객관적인 사실만을 기록하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객관적인 사실은 십자가의 깊은 의미를 독자들로 하여금 해설하고 적용할 수 있는 한없이 깊은 은혜의 샘물을 제공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왜 죽으셔야 했나요?
먼저 예수님의 죽으심은 대속의 죽음입니다(46 절)
십자가의 죽음은 저주받은 죽음이라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바입니다.1 하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받은 저주는 누구의 죄로 인한 저주입니까?
바로 전 인류의 죄에 대한 저주요, 내가 받아야 할 저주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2라고 부르짖습니다. 평소에 늘 아바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부르셨던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만큼은 공식적인 호칭인 “엘리”(나의 하나님)를 사용합니다.
전 인류의 죄를 짊어진 대표로서 공의의 재판관 되시는 하나님을 공식적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십자가의 대속의 의미를 해석해 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갈 3:13a)
두 번째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죄의 담이 무너졌습니다(51 절)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사건으로 성소 안에 지성소로 들어가는 입구를 가리고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고 복음서 기자들은 말합니다. 지성소는 일년에 한 번 대제사장만이 유일하게 들어갈 수 있는 거룩하고 두려운 장소입니다. 하나님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임한 장소가 바로 언약궤가 있던 지성소였습니다. 이곳을 막고 있던 두꺼운 장막이 찢어졌다는 것은 누구나가 그 거룩한 하나님 앞으로 담대히 나올 수 있음을 의미하고, “위로부터”라는 것은 그렇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것을 모든 성도가 왕 같은 제사장 되었음으로 해석3했고,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이러한 은혜를 만인제사장 신학으로 발전 시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해 줍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엡 2:14)
세 번째로 예수님의 죽으심은 부활의 첫 열매로 이어집니다(52-53 절).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시자 온 천지가 이를 슬퍼하며 지진이 일어나고 바위가 터지며, 심지어 죽었던 자들이 부활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결코 부활의 첫 열매는 아닙니다. 사실 이들보다 먼저 다시 살아난 사람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도 몇몇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기 얼마 전 나사로를 살리셨던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와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살아난 몇몇 사람들은 그 이후에 어떻게 되었나요? 맞습니다! 다 죽었습니다. 진정한 부활의 육체는 죽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의미는 부활로 연결 됩니다. 죽음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0)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죽으심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줍니다(54b 절).
로마의 백부장은 죽음과 관련된 전문가입니다. 수많은 사형수들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 자 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처럼 죽음을 맞이하는 자는 본 적이 없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피조세계의 반응은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한 일(51-54 절)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연스럽게 예수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마가(막 1:1), 세례 요한(요 1:34), 베드로(마 16:16) 뿐 아니라 사탄까지도 인정(막 5:7)하고 고백하는 바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우리와 관련하여 더욱 확대하여 적용한다. 아들이신 예수님 덕분에 우리까지 하나님의 양자가 된 것입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 4:6)
본문은 냉정하리만큼 객관적인 시각으로 예수님의 죽음을 지킨 자들이 무시당하던 여인들이었음을
보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한 자도 사도들이 아닌 보잘것없는 여성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우리에게 알려주나요? 예수님의 죽으심의 의미는 이토록 깊은 은혜와 의미가 있지만,
그것 곧 “십자가 예수”를 내 것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자만이 그 은혜를 누릴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의 의미가 나를 위한 것입니까?
아니면 그저 온 인류를 위한 것입니까?
예수님은 오직 나 하나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도 십자가를 지시는 분입니다.
나 때문에 죽으시고, 나 때문에 부활하신 분입니다. 주님께 따지고 싶지 않으십니까?
왜, 날 사랑하시나요? 왜 나 같은 자를 사랑하시나요! 왜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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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3)
2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는 시 22:1 을 인용한 것으로 마태는 자신들의 독자인 유대인들을 위하여 히브리어 ‘엘리’(나의 하나님)을 헬라어 음역으로 ‘엘리 엘리’로 그대로 기록했고, 마가는 예수님 당시 사용된 통용어 아람어 ‘엘로히’(나의 하나님)를 헬라어 음역으로 ‘엘로이 엘로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3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벧전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