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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7 새벽묵상 - 사랑의 데자뷰 (요21:1-14)



운전을 하다 보면 가끔 트렁크에 물고기형상의 표시를 부착한 차 뒤에 멈춰 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전혀 누구인지도 모르는 그 차 운전자에 대해 왠지 모를 친근감을 느낍니다.

어떤 것은 물고기 형상만 있고 어떤 것은 물고기 형상 안에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ΙΧΘΥΣ 또는 ἰχθύς



보통은 ‘익투스’(요 21:11)라고 알려져 있지만, ‘잌뒤스’가 더 정확한 발음인 것 같습니다.

앞에 것은 헬리어 대문자이고 뒤에 것은 소문자로 “물고기”라는 의미입니다.

초대 기독교는 십자가를 교회의 상징으로 사용하지 않았고, 물고기를 교회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는데,

오늘 본문의 사건(cf.오병이어)과 더불어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그 이유입니다.



Ιησους Χριστος Θεοs Υιος Σωτηρ

이에수스 크리스토스 데오스 휘오스 소테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 아들 구원자



베드로 고백의 앞 글자만을 모은 것인 바로 ‘잌뒤스’, ‘물고기’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초대 기독교는 물고기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였던 것 같습니다.

먼저 제자들 대부분이 어부였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7 인의 어부는 베드로, 디두모 도마, 나다나엘이라 불리는 바돌로매,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이름 없는 2 명의 제자인데, 대부분은 같은 어부인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와 친구 빌립으로 봅니다. 

또한 물고기와 관련된 사건이 얼마나 많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오병이어, 물고기 입 속 동전, 제자들을 부르실 때 사건, 그리고 오늘 본문의 사건 등

특히 베드로와 제자들을 부르실 때 사건(눅 5:1-10)과 오늘 본문은 데자뷰(Déjà vu)1를 이룹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 세 번째라고 보고합니다.

하지만 복음서 전체를 살펴보면 10 번도 넘게 나타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마리아를 만난 사건을 제외하고, 제자들과 만나는 만남

가운데 본문의 만남이 “완벽한 사랑의 만남”(3 이라는 완전수)임을 말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밤새 고기를 잡았지만 제자들은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찾아오신 주님은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질 것을 명령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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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 말로는 ‘기시감’(旣視感)이라고 하며 프랑스말로는 ‘이미 본’이라는 의미의 단어로 처음 보는 대상이나, 처음 겪는 일을 마치 이전에 보았다는 느낌을 받는 이상한 느낌이나 환상을 말한다.





제자들은 순종하여 153 마리2의 고기 잡게 됩니다.


그제서야 예수님임을 눈치 채고 베드로는 겉 옷을 두르고 물 속에 뛰어들어 예수님 앞에 나갑니다.

배에서 해변까지 거리는 오십칸(페콘디아코시온), 그러니까 이백 규빗이고 오늘날로 환산하면 90-

100m(99-110yd)의 거리가 되는 것입니다.

헤엄을 치거나 물 속을 걸으려면 입고 있던 옷도 벗어야 하는데, 오히려 베드로는 젖으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거워지는 겉 옷을 두르고 바다 속으로 뛰어듭니다.

무엇이 그를 차가운 새벽 바다로 무거운 겉 옷을 두른 채로 다이빙하게 하였을까요?


너무 사랑해서 바다로 뛰어 들었지만,

젖어서 축 쳐진 겉 옷에서는 마치 마음에서 솟아나는 회개의 눈물과 같은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지만,

막상 주님 앞에서니 도저히 할 말이 없습니다.


베드로 앞에는 너무나 익숙한 숯불이 펴 있습니다.

주님을 모른다고 3 번이나 부인한 너무나 추웠던 밤에 숯불을 떠올리게 하는 데자뷰입니다.

주님은 밤새 수고한 제자들을 따듯한 떡과 물고기로 위로하며 말없이 사랑의 데자뷰를 만들어 가십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실패와 자기자신에 대한 실망으로 절망하는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또한 그 어떤 일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밖에서는 사랑하는 주님을 따를 수도 없고, 물고기 한 마리도 잡을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아셨던 주님, 베드로와 제자들의 실패와 절망도 미리 보실 수 있는 주님이 그래서 십자가 지시기 전 마지막 밤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실패와 절망에 울고 있는 오늘 나에게도...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요 15: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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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떤 학자들은 153 이라는 숫자에 대해 많은 해석을 시도하지만, 단순히 잡을 수 있는 최대의 숫자라고 보는 것이 옳다. 아마도 그 그물의 크기에 담을 수 있는 최대의 숫자일 것이다. 그릇을 크게 준비하는 것이 좋다. 입을 크게 열라! 한편 한국의 ‘모나미’라는 기업은 이러한 믿음으로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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